-높빛시론-
[고양신문] 얼마 전 일이다. 포천에 살던 친척 할머니가 타계했다는 부음을 받고 서둘러 찾아간 적이 있었다. 몹시 추운 날이었으며, 또 코로나19로 인해 마음대로 문상조차 할 수 없는 때인데도 불구하고 후손들은 거의 다 빈소를 찾아온 듯했다. 향년 92세인 할머니는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실향민 1세대였다. 월남한 이후 시장에서 건어물을 장사하던 할머니는 그러나 생전에는 고향 이야기를 입 밖에 자주 꺼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그날 할머니의 임종을 지킨 친척 동생이 전한 말은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아주 절실한 목소리로,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 고향 갈래’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7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응어리진 그 한을 가슴에 안고 속울음을 울며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문득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에 나오는 어머니가 실성하여 부르짖던 ‘가자’는 말이 떠올라 전율을 느꼈다.
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일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각 당이 선출한 후보들은 저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내세우며 유세를 펼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것같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크게 거느리고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대통령을 만들기 위하여 각 후보의 선거캠프에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석학들이 총망라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후보들이 매일같이 쏟아내는 공약이란 대부분 그들의 학식과 지혜, 경륜에서 나온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번 대선 후보들의 공약에는 통일에 대한 구체적 대안보다 안보가 우선시되는 것일까. 평화통일이라는 명제가 이제는 유권자들에게 관심 밖이라는 의미일까. 아니면 난수표 같은 남북 관계를 풀어내기보다 안보를 비롯한 솜사탕 같은 현실적 문제가 더 의미 있다고 판단한 까닭일까. 어쨌든 후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평화통일 문제보다는 오히려 미국이 내세우고 있는 북의 비핵화와 강력한 대북 제재 유지는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드 추가 배치 대신 우리가 전략무기로 개발한 한국형 미사일을 배치하는 게 더 타당하다는 것 등으로 맞서고 있으며, 여차하면 킬 체인, 즉 선제타격도 불사하겠다는 공약이 난무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안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안보는 국민의 안위를 지키고 국가 주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절대적 가치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드 추가 배치나 한국형 미사일 방어 시스템 개발이 과연 우리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남북의 신무기 개발은 결국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장애가 되는 것은 물론, 또 다른 신무기를 개발하고 양산하는 악순환을 거듭할 뿐이다. 따라서 그것을 최우선 순위에 둔다면 적대적 관계를 심화시킬 뿐, 평화통일을 위한 보탬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 가운데 또 하나 우리가 짚고 가야 할 점은 유권자들의 관심도가 높다는 이유로 매일 지지율 등은 비중 있게 다루면서도 뜬구름 잡듯 하는 후보들의 이 같은 통일관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언론매체이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세운 정권에서 평화통일에 대한 정책이 일관성을 잃고 바뀌는 것을 수시로 목격했다. 안보를 앞세운 그것이 통일로 가는 길의 올무가 되기도 했으며 걸림돌이 된 적도 많았다. 그래도 우리가 묵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헌법 제3조를 이루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또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라는 거시적 안목을 버리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적어도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할 말도 못 하고 굴종하고 있느냐’는, 막무가내식 발언은 하지 않았다.
정치란 과연 무엇일까. 정치의 궁극적 목적이란 결국 국민의 아픔을 치유하고, 국민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그 숫자가 점점 줄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할머니와 같은 이산가족들의 한도 풀어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게 정치 아니겠는가.
살아생전 다시는 밟지 못한 할머니의 고향 땅, 평양 대타령. 그렇다면 지금쯤 할머니의 영혼은 그곳을 잘 찾아갔을까. 혹시 아직도 찾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것은 아닐까.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나는 동생이 들려주었던 ‘나, 고향 갈래’ 했다는 할머니의 마지막 절규가 자꾸만 고막을 때려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