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고양신문] 양혜왕은 맹자를 만나는 자리에서 나라의 이익을 위해 도움말을 달라고 했다. 당연한 주문 아니겠는가? 기껏 이름난 철학자를 모시고 와서 우유함영(優游涵泳)하며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하나라도 더 듣고 배워 부강한 나라를 세우는 것은 통치자의 책무다. 그런데 맹자는 발끈했다. 어찌 나에게 이익을 묻느냐며, 인의를 물으라고 호되게 몰아붙였다. 맹자는 왜 그랬을까?
양혜왕은 이미 국부를 늘리려고 전쟁을 벌이다 영토는 물론이거니와 아들마저 잃었다. 오로지 이익만을 추구할 때 맞닥뜨리는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이익을 물었다. 전쟁의 시기에 요구되는 나라의 이익은 번뜩이는 군사작전이나 의표를 찌르는 외교전략이었을 터다. 하나, 전쟁을 일으키면 죽어나가는 것은 백성이다. 장년의 남성이 전쟁터에 나가면 농사를 지을 수 없어 가을에는 노인과 여인, 그리고 아이가 굶어 죽었다. 온 세상이 도탄에 빠졌다. 외교는 현상유지의 다른 말이었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그 시대를 지배한 통치세력의 상식에 정면으로 맞서는 수밖에 없었다. <맹자>는 여러 이야기가 섞여 있지만, 왜 우리가 인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피를 토하며 뱉은 말의 모음이다.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를 조롱하면서 일관되게 “정의는 강한 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각 정권은 자기의 편익을 목적으로 삼아 법률을 제정하는 법”이라고 부연설명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현실적인 주장이라고 평가할만하다. 시민을 위한다고, 나라를 위한다고 설레발쳤으나, 결국에는 권력을 잡은 정치집단의 이익을 위한 정책인 경우를 자주 보아왔잖은가. 소크라테스는 특유의 문답법으로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논파해나가며 마침내 “통치자라면 자신에게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주게 되는 쪽이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한다는 주장에 이른다.
역시 소크라테스 선생! 이라고 탄복할 수 있다면 <국가>는 1장만 쓰였을 것이다. 트라시마코스를 이어 제자가 나선다. 자신은 소크라테스 선생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세상인심은 그렇지 않다며 “정의롭지 못한 삶이 정의로운 삶보다 훨씬 낫다고들 말”한다고 했다. 왜 그런지는 놀랍게도 우리의 상식과 딱 맞아떨어진다. 정의롭지 못한 이들은 거리낌 없이 이득을 얻으니 돈을 왕창 번다. 그 돈으로 친구는 잘 되게 해주고 적은 해롭게 한다. 이익공동체가 생겨나니 더 큰 돈을 벌게 된다. 돈이 많으니 신께 제물과 봉납물을 넉넉하고 호사스럽게 바치니 “정의로운 사람보다도 더 신의 사랑”을 받게 된다. 이러니, 누가 정의로운 삶을 살려 하겠는가. <국가> 2권 중반부터 마지막 대목까지는 바로 이런 상식적인 정의관에 맞서 소크라테스가 정의란 무엇인지, 그리고 정의롭게 사는 삶이 왜 좋은지 해명하는 말로 수놓아졌다.
대선이 끝났다. 주변에서 희비가 엇갈리는 반응을 보며, 다시 맹자와 소크라테스를 기억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어느 정권이든 결국에는 통치세력의 이익에 더 치중했다. 그리고 정의롭지 않은 자가 더 잘 사는 사회가 되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맹자와 소크라테스는 지배적인 상식에 맞섰다. 그 부딪침이 바로 철학하는 삶이고 인문정신이다. 이제 시민사회의 영역을 되돌아보자. 거기에 인의와 정의의 싹이 남아 있다. 할 일이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