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행주대첩제 봉행하며 권율장군 등 활약 기려
[고양신문] 제429주년 행주대첩제가 14일 덕양산 행주산성 내 충장사에서 봉행됐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약 10개월이 지난 1593년 2월 12일(음력)에 새벽부터 저녁까지 조선군과 일본군은 치열한 전투를 치렀고 큰 승리를 쟁취했다. 이 승리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으로 널리 이름났고, 지금까지 행주대첩제를 지내며 행주대첩의 지도자 권율 도원수를 기리고 있고 행주서원에서는 봄가을로 제사지내며 일곱 분을 기념하고 있다. 올해에도 행주산성 충장사에서 행주대첩제를 봉행하며 행주대첩을 기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고양시 최고의 유적지인 행주산성의 행주대첩에서 영웅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리했다.
행주대첩 기념 기공사, 대첩비
행주대첩의 기념물로는 1602년 행주산성 정상에 세워진 행주대첩비(초건비)와 1845년 세워진 행주대첩 중건비, 1963년에 세워진 행주대첩비 그리고 권율 장군의 사당인 기공사와 행주서원, 1970년 행주산성 문화재 정화작업이 시작되며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 등이 있다.
행주대첩(1593년 2월)은 한산도대첩(1592년 7월), 제1차 진주성대첩(1592년 10월)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다. 행주대첩을 기념해 1842년 세워진 기공사는 헌종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도원수 권율의 사당이었다. 이후 고양유림들의 발의로 2008년 5월 기공사에 권율 도원수와 함께 선거이·조경·변이중·이빈·정걸 등 5명의 장수와 뇌묵당 처영 선사를 함께 배향하게 됐다. 또한 기공사에 있다가 1970년대 충장사로 이전됐던 행주대첩 중건비도 2011년에 다시 기공사에 재이전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주얼로 표현되는 행주대첩
행주대첩은 풍전등화의 국난 위기에서 백성들과 관군이 힘을 합쳐 이뤄낸 승리였고 이 승리의 정신은 ‘행주얼’로 표현되고 있다. 인근 도래울 마을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석탄 이신의 선생,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고 북한산으로 도주한 조선군과 명나라 군을 위기에서 구했으며 행주대첩 당시 참여해 밥을 해주고 부상병을 치료해줬다고 생각되는 밥할머니 등이 대표적인 백성들의 참여일 것이다.
몇 년전부터 행주대첩 승리의 요인을 '행주얼' 뿐만 아니라 한강과 창릉천을 배수진으로 친 전투에서 조류의 영향을 받은 지리적 요인과 당시 세계적으로 앞서 있었던 변이중의 화차, 총통류,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화약을 사용하는 신무기 사용을 들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3000여 명의 군사로 3만여 명의 왜군을 무찌르고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데는 기공사에 배향된 분들의 탁월한 지도력과 밥할머니를 비롯한 의병들 그리고 처영선사가 이끌었던 승병 그리고 관군의 일치단결된 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행주대첩 상징 인물 권율
영의정의 아들로 태어난 권율은 소위 금수저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45세의 나이였던 1582년, 사위인 이항복보다도 늦게 과거시험을 보고 병과에 합격해 출사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광주목사로 발령됐고,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전라도 순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 휘하에서 용인까지 올라왔다가 작전실패로 첫 패배를 경험했다. 이후 동북현감 황진과 함께 전주 이치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됐다. 이해 12월 독왕산성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세마대에서 쌀로 말을 씻기는 퍼포먼스를 하며 지혜로 왜군을 물리친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이 시기 가장 시급한 것은 한양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을 통해 행주산성으로 병력을 옮기고 이곳에서 임진왜란 3대첩의 실화를 남겼다. 이 승리로 권율은 문관으로서 군권을 부여받고 군대를 통솔하는 최고관인 도원수에 제수됐다.
승리 초석 다진 조경
조경은 권율 장군과 함께 행주산성 현장에 있던 장군이다. 1592년 모친상을 당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권율의 부탁으로 중군장이 되고, 이듬해 권율의 조방장(助防將)으로서 행주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행주대첩 당시 조경은 큰 전투를 앞두고 군사들의 힘을 빼지 말라는 권율의 말을 무시하고 행주산성 주변에 말뚝을 박아 만드는 목책(木柵)을 이중으로 만들었다. 일설에 따르면 목책에 행주에 흔한 뻘 흙을 발라 불에 타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목책은 배수진을 친 목숨 건 싸움에서 행주대첩을 이뤄낸 기초를 만든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권율은 자신의 명을 거역하고 목책을 만든 조경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조정에 칭찬하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고, 조경은 행주에서 승전한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봉됐다.
서원에 배향된 스님 처영
2008년 행주대첩의 영웅들을 행주서원에 배향할 때 뇌묵당 처영 선사도 함께 배향됐다. 전국 서원 중에서 스님을 배향하고 있는 곳은 행주서원뿐일 것이다. 처영 선사는 서산대사의 제자이고,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며 권율 장군과 함께 이치전투, 독산산성 등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행주대첩에서 재주머니를 만들어 왜군을 공격한 일화가 유명하다. 행주대첩 이후 조정에서는 무신 정3품 당상관의 품계인 절충장군(折衝將軍)이라는 직함을 내렸다.
한산도·행주대첩 공 세운 선거이
선거이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도군수로 있으면서 전라 좌수영(左水營)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과 함께 한산도대첩에 참여해 왜군을 크게 물리치는 공을 세워 병마절도사가 됐다. 1593년 1월에는 전라도 순찰사 권율과 함께 독산산성에서 왜군을 공격해 경기도 일대를 탈환했고, 이때 큰 부상을 입었다. 행주대첩 당시 금주산에 진을 쌓고 후방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차단하며 행주대첩의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 행주산성에 함께 있지는 않았지만 후방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역할을 한 선거이는 이순신을 도운 한산도대첩, 권율을 도운 행주대첩에 참여해 공을 세운 장군이다.
‘화차’로 왜군 무찌른 변이중
임진왜란 초반에 왜군의 조총으로 인해 조선군은 지리멸렬하다시피 했지만 곧 반격을 시도했다. 이때 각종 총통과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조선의 발달된 화약무기가 큰 역할을 했다. 변이중은 세종대왕 때 특히 큰 발전을 거듭한 화약무기 중에서 탄환을 발사할 수 있는 승자총통 40기를 3면에 장착한 화차 일명 ‘변이중 화차’를 개발했고, 40여 대를 권율에게 보냈다. 이 화차가 행주산성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고, 이 공로로 행주서원 기공사에 배향됐다.
화살 싣고와 공헌한 이빈·정걸
『연려실기술』에 ‘전투 중에 화살이 다 되어 진중이 위기인데 정걸이 배 두 척에 화살을 실어 와서 같이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고 『선조수정실록』에는 ‘화살이 거의 떨어지려 할 때 수사 이빈이 배로 수만 개의 화살을 실어다 주었다’라고 되어 있다.
묘시에서부터 신시에 이르기까지 싸우느라 화살뿐만 아니라 무기가 떨어졌을 때 정걸 수사와 이빈 수사가 화살을 싣고 온 것이다. 당시 79세였던 정걸 장군은 임진왜란 기간 내내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이어린 이순신 장군을 도우며 전투에 참여하며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화살을 싣고 온 장군이 두 사람 모두인지, 아니면 두 사람 다인지 의견이 다르지만 현재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우며 구국을 위해 헌신한 두 분 모두 행주서원에 배향됐다.
위에 언급한 행주대첩 7명의 영웅 그리고 밥할머니와 석탄 이신의 선생, 류형 장군 등이 고양시에 임진왜란 관련 대표적인 인물이다. 행주서원 내 기공사는 헌종이 권율도원수를 기리기 위해 사액한 사당이다. 2008년 기공사에 추배되신 여섯분의 위패를 행주산성 내 충장사에 배향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또한 밥할머니보존회(회장 임현철)에서는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력도 부각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러시아의 무도한 전쟁발발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는 이때에, 429년 전 고양군 덕양산 행주산성에서 일어났던 승전의 역사 '행주대첩'이 갖는 가치를 다시 되새기며 행주산성이 단순한 관광의 의미를 넘어서서 전쟁 그리고 평화로 나아가는 교육의 현장이 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