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자
김경윤 인문학자

[고양신문] 요즘 따라 밥을 맛있게 먹습니다. 먹는 음식마다 싱겁든 짜든 그 맛을 온전히 느끼면서 감사의 말이 절로 쏟아집니다. 잔멸치볶음을 먹다가 내가 이 멸치를 먹을 자격이 있나 혼잣말을 되뇝니다. 식구들은 장난으로, 늙어서 그렇다고 핀잔을 줍니다. 오늘도 맛있게 밥을 잘 먹었습니다. 아내에게 “고맙습니다” 인사를 합니다. 아내가 빙긋이 웃습니다. 밥은 잘 먹었는데, 오늘따라 갑자기 한숨을 쉽니다. 그리곤 이내 기분이 우울해집니다. 아내는 의아해하며 왜 그러냐고 묻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나도 몰라” 답합니다. 이 롤러코스터 같은 나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없습니다. 조울증일까요? 요즘에는 선거후증후군 같은 것이 있다는데, 그런 걸까요?

도서관을 빼야 할 시간이 한 달도 안 남았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잘 아는 시인이 운영하는 서점도 곧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어렵사리 운영하던 작은 규모의 가게들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어디 가게뿐이겠습니까? 내가 겪는 어려움은 드문 현상이 아닙니다. 이 어려움 또한 나의 한숨의 한 이유겠지요. 내가 바랐던 세상은 점점 멀어지고, 내가 원했던 삶도 잘 풀리지 않습니다. 나이는 먹어가는데, 별로 이루어놓은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오늘따라 날씨가 꾸물꾸물하네요. 써야 할 원고가 넘쳐나는데 머리가 복잡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이런 날은 일단 일을 내려놓고 산책을 하거나 몸을 써야 합니다. 쓸모없는 생각을 비워야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농장으로 가기로 합니다. 봄은 왔고 갈아야 할 밭이 있습니다. 원래는 주말에 가려고 했는데, 일정을 앞당깁니다. 밭에 가니 아무도 없습니다. 하기야 평일 오후인데 누가 있을까요? 장비를 챙기고 목장갑을 끼고 유박퇴비를 뿌리고 곡괭이로 밭을 갈기 시작합니다. 묵은 밭을 갈아엎자 짙은 황토색 흙이 몸을 드러냅니다. 흙냄새가 훅 코에 들어옵니다. 심호흡하고 다시 곡괭이를 내리꽂습니다. 열 평 남짓한 밭을 다 갈자 좋은 땀이 흐릅니다. 어느새 잔걱정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힙니다. 밭도 갈고 근심도 내려놓았으니 이보다 좋은 날이 없습니다.

농사의 시작이 밭갈이에 있는 것처럼, 어떤 일이든 묵은 것을 갈아엎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도 “새 술은 새 부대에”라고 말했습니다. 내 인생에 묵은 것이 많았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버려야 할 것도 참 많습니다. 과거의 것을 평생 안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죽음처럼 모든 것을 내려놔야하는 순간이 오기 전에도, 우리는 많은 것을 내려놔야합니다. 이 낡은 지혜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래요, 요즘 우울합니다. 그리고 그 우울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과거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겠지요. 하루하루 살면 참 좋은 삶인데, 과거에 붙잡혀 살았습니다. 오늘 밭을 갈며 이 낡은 과거를 갈아엎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밭을 갈고 돌아와 이 칼럼을 씁니다. 깨끗하게 갈아놓은 밭에는 감자도 심고, 온갖 쌈채소도 심을 것입니다. 철에 맞춰 가지도 오이도 호박도 참외도 고추도 깨도 부추도 심겠습니다. 때에 맞춰 풀도 잡고 지줏대도 세우겠지요. 잘 자란 작물은 정성스럽게 따다가 가족과 이웃에게 나눌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의 밭도 잘 갈겠습니다. 묵은 마음의 밭을 갈고 나면 그곳에 여리디여린 새로운 생명의 생각을 심고, 잘 가꾸겠습니다. 자칫 방심하면 잡초가 무성해지겠지만, 그 잡초도 생명의 양분이라 생각하며 잘 잡아 새로운 생명의 생각 위에 덮어 거름으로 삼으면 됩니다. 바람불고 비도 오고 번개가 쳐도 새롭게 심은 생명의 생각은 잘 자랄 것입니다. 봄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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