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마음이야기-
[고양신문] 우리는 아는 건 알고 모르는 건 모른다. 그러나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기가 쉬운데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웬만하면 숨긴다.
‘아는 체’의 중요성은 한때 서점가를 휩쓴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시리즈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힘입어 TV 방송에도 <알쓸신잡>이 등장해 인기를 누렸다. 우리가 대화할 때 좀 안다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얼마나 용을 쓰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철학은 몰라, 나는 와인은 몰라, 나는 오페라는 몰라라는 말을 하기가 얼마나 힘든가 말이다.
첫째 아이가 다리를 저는 걸 발견하고 여러 병원을 수소문했다. 일산의 한 종합병원 교수를 만났는데 일단 MRI를 찍자고 했다. 아이가 잠이 들지 않아 촬영을 실패하고 다른 의사를 만났다. 이리저리 만져보고 관찰하더니 괜찮다는 결과였다. 여전히 아이는 다리가 아프다 하고 절었다. 이번에는 제일 큰 병원으로 가보자 마음먹고 서울의 세브란스병원을 갔다. 연륜이 느껴지는 그 의사는 고백하듯이 말했다.
“저도 잘 모릅니다. 검사를 해보지요.”
모른다니, 세브란스 의사가 모른다면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했다. 그동안 진찰한 의사들이 말없이 검사만 권유했을 때 쌓였던 답답함이 사라졌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자신감으로 비쳐졌다. 알아야 권위가 생긴다고 믿는 사회에서 그 권위가 짓누르는 의무를 시원하게 벗을 줄 아는 의사라니 멋지기까지 했다.
우리도 병원에 가면 대충 느낀다. 이 사람도 잘 모르는구나. 신경성입니다, 알레르기입니다라는 답변의 그늘이 은연중에 느껴진다. 실은 저도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의사는 못 봤다. 마치 금기어라는 듯이. 의사뿐만이 아니라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질문을 두려워한다. 물었는데 답을 못하면 ‘아니 박사가 모른다니, 변호사 맞아, 회계사라면서 그것도 몰라’라는 소리 듣기 십상이다. 오랜 시간 공부하고 자격증을 이수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기억력이 뛰어나다 해도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는 세상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차마 모른다고 말하지 못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는 탓도 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옛말도 있다. 여전히 우리는 모르지 않다는 위장을 하며 어깨에 한껏 힘을 주고 긴장한 채 살고 있다.
한번은 도올 김용옥 선생이 밤마다 책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얘기를 하였다. 전에는 칸트의 책을 보면 이 자식이 뭐라는 거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려워서 애를 먹었는데 나이가 든 지금 이제야 조금 알아듣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밤에 잠도 안 자고 고전을 읽는 재미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동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려 했다가 포기했던 이들이 얼마나 위로를 얻었을까. 철학을 전공한 사람은 더더군다나 밝힐 수 없는 비밀이었다. 필자 얘기다.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었는데 우리는 모르면서 아는 듯 고생을 하고 있다. ‘나도 실은 잘 몰라’하는 고백이 있다면 덜 힘들 것을, 완벽할 수 있는 척 용을 쓰다 보니 병이 날 지경이다.
고대부터 내려온 한자를 보자. 안다는 뜻의 알지(知)자는 있지만, 모른다는 뜻의 글자는 없다. 없을무(無)를 붙이는 걸로 대신했을 뿐이다. 영어도 know 또는 not know로 표현한다. 우리는 다 모르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그러다 하나하나씩 알아가는 건데 그마저도 왜곡된 채로 받아들이는 게 부지기수라서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이다. 알아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말해도 된다. 잘 모릅니다. 저는 잘 모릅니다. 진정한 강자는 오늘도 자신에게 묻는 누군가에게 말했을 것이고 약자는 대충 둘러대며 모름을 들키지 않으려 피했을 것이다.
살구꽃이 살구가 될지 알고 피었나 또 벚꽃은 자신의 존재를 알고 피었나, 우리는 다 모른다. 아이에게 고백하자. “나도 잘 모른단다, 모른 채로 지금까지 살았는데 몰라도 살 수 있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