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애 칼럼 [어느 책모임 중독자의 고백]

“…그 시절 저는 사람을 만날 때 이 사람이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가 굉장히 중요했었는데요, 또 다른 페미니스트이자 퀴어인 친구는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자기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있다는 거예요. ‘나에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는가.’ 그때 뭔가 종이 울리는 느낌이었어요.”

영화 《벌새》의 감독 김보라가 황선우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황선우가 만난 9명의 ‘멋있는 언니들’과의 인터뷰 내용에는 이 외에도 수많은 명언들이 쏟아지는데, 나는 이 말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내가 지금 딱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교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본능적으로 나에게 안전한 느낌을 주는 사람만 내 울타리 안에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양시의 다양한 시민사회 단체와 연대하는 활동을 하면서 그동안의 사회생활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인맥이 형성되었다. 대부분 나보다 연배가 10년 이상 되는 선배들을 소개받는데, 남녀를 불구하고 권위적인 사람을 별로 만나 보지 못했다. 회사와 얽힌 관계로 만난 것이 아니다 보니 나이차가 있어도 친구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편했다. 물론 그것은 순전히 후배인 내 입장이었을 수도 있겠다. 

남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넌 왜 맨날 언니들하고 놀아?” 그때 내 대답을 심플했다. “나랑 놀아 줄 동생들이 없으니까.” 몇 가지가 함의된 대답이었다. 내 또래를 비롯하여 내 주변에 함께 어울리는 후배 층이 얄팍하다는 뜻이기도 하겠고, 요즘 후배님들이 나 같은 선배를 만나 꼰대질을 들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어느 쪽이든 그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만나는 수많은 선배들이 비교적 꼰대질하지 않는 이들이라는 걸 입증하는 셈 아닌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만남을 유지할 에너지가 나에겐 이제 없다.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마흔이 넘으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며칠 전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았다. 그때 내가 어떤 태도를 취했더라. 복기해 보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조금은 주제넘은 이야기를 떠들었던 것도 같고, 분위기를 띄워 보겠다고 실없는 소리를 한 것도 같다. 그런데 다음번 만남의 자리에서 그분이 나에게 바로 호감을 표시하며 나이를 물었다. 순간 머릿속에 ‘핑’ 하고 든 생각. ‘이 사람은 나에게 안전한 사람인가.’ 수년을 알고 지낸 사람과도 나이를 트지 않고 친구처럼 지내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좀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나이 공개를 꺼려하는 것도 아니기에 주저 않고 말해 주긴 했다. 그분이 나보다 1살 더 많았다. 날 서너 살쯤 더 어리게 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우리는 바로 친구 먹었다. ‘선배’ 소리가 듣고 싶어서 나이를 물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이에게 내가 어떻게 바리게이트를 칠 수 있겠는가. 솔직히 난 그분의 눈빛을 보면서 ‘멋있는 언니’가 되고 싶었다. 

김민애 기획편집자
김민애 기획편집자

황선우가 인터뷰한 9명의 여성들은 세속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보기 좀 어렵다. 하지만 자기 분야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마음의 힘을 믿고 꿋꿋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멋있다. 멋있으니까 다 언니다. 나이 따위는 상관없다.

나는 성공이 아니라 피어나고 피어나고 또 피어나는 그렇게 멋진 언니가 되고 싶다. 세상이 그렇게 멋진 언니들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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