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원석 칼럼 [내일은 방학]
[고양신문] 가끔 제자들에게 전화가 오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대뜸 “선생님~ 저 누군지 아세요?”로 머릿속에 있는 제자 명렬표를 검색하게 만든다.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카톡 친구로 등록되어 있으니 빛의 속도로 프로필 사진을 확인하면 위기 모면.
그런데 혹여 제자 이름이 ‘김민지’이면 더 혼란에 빠진다. 핸드폰 속 제자 김민지는 이미 10명을 넘은 지 오래다. 팬데믹은 당황스러워도 기다려지는 제자와의 추억 여행 역시 멈추게 했다. 스승의 날이면 어김없이 울리던 카톡도 지난 2년 동안 현직 교사로 있는 제자 몇 명만이 다였다. 섭섭함이 아니라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제자들의 안위가 많이 걱정되었다.
올해는 작년 고3 담임을 맡은 터라 카네이션 한 송이, 박카스 1박스를 들고 찾아오고 있다. 담임을 맡게 돼서 좋은 것은 다시 제자들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졸업하고 연락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고3 담임일 경우가 많다. J고 근무 시절 지금은 유명한 예능인이 된 H의 고2 담임을 맡았었다. 데뷔앨범이 나오는 날 통화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이돌을 거쳐 유명 예능 프로그램의 고정 출연자가 되었을 때는 정말 기뻤다. 하루는 방송에서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과의 추억을 언급한 장면을 봤는데, 내가 아닌 고3 담임교사와의 일화였다. 생각해보면 지금 연락하는 제자들의 90%가 고3 담임으로 만난 아이들이니 당연히 이해가 갔다. 다만, 그 이후 그 제자의 관련 기사에 언플을 달지 않는 정도.^^
생각해보면 각자 어딘가에서 삶을 살아내고 있을 그들을 많이 잊고 살았다. 스승의 날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제자 한 명이 있다. 그를 소환해 본다.
졸업 후 지친 어깨에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선생님,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사 주세요” 하고 연락했던 L은 영화감독이 꿈인 아이였다. 경제 상황이 어려워 취업이 바로 가능한 대학을 갔지만 영화는 그에게 생명이었나 보다. 학교를 중퇴하고 영화판을 기웃거리기를 1년. 하루는 학교 앞 단골 삼겹살집에 있노라고 문자가 왔다. 종례 후 헐레벌떡 가보니 눈은 퉁퉁 붓고 온몸에 파스 냄새가 진동했다. 소주 석 잔을 내리 원샷 하더니,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1) 아주 유명한 영화감독 집에 무작정 찾아감 2) 영화를 배우고 싶으니 현장 스태프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함 3) 감독은 자신을 유령 취급함 4) 집 앞에 있는 감독 차량을 세차하기 시작함 5) 2일째 되는 날, 감독이 세차 도구를 던지며 쌍소리와 함께 지금 이렇게 내쫓는 걸 나중에 감사하게 될 거라고 했으나 6) 한 달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찾아가 결국 스텝 합류 성공.
그런데 막상 영화판에 들어가니 온갖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고 담배도 피지 않는 아이가 모든 스태프의 담배 종류를 외워 가방 안에 늘 갖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손은 이미 소주를 글라스에 따르고 있었다.
“그만둬라. 이 정도 했으면 진짜 최선을 다한거야. 도대체 어떻게 때리면 멍 자국이 그렇게 선명할 수 있니? 선생님이 정말 화난다.”
위로의 말이 아니라 위기에서 구하고 싶었다. 그런데 다시 촬영장에 가야 한다며 벌떡 일어나 남은 소주를 털어놓고 남긴 그 말이 18년이 더 지난 일인데도 생생히 기억난다.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열정이란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는 거라고. 머리로 하고 싶은 일은 몸이 힘들면 멈추지만, 가슴이 시키는 일은 몸이 힘들수록 행복할 거라고. 그게 열정적인 삶이라구요. 저~ 열정하러 갑니다.”
그날 이후 나는 어떤 제자에게도 열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가슴이 시키는 일일수록 그 일은 지속 가능해야 하니까. 그리고 더 이상의 말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열정 소녀 L과 정확히 2년 전 오늘 그 당시 삼겹살집에서 만났다.
물었다. “행복하니?”
대답했다. “선생님께 삼겹살과 소주를 사드릴 수 있어서 열라 행복해요.”
스승의 날이 되면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빚에 미안해하는 제자들이 많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자는 나의 말빚으로 우리는 이미 퉁쳤다고.
종이 쳤다. 오늘은 교실에서 말빚을 지는 대신 말벗이 되어 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