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가와지볍씨박물관 명예관장이자 고양시 명예시민인 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가 고양신문에 기고문을 보내왔습니다. 2010년에 고인이 된 손보기 교수에 대한 글과 고양가와지볍씨 연구와 박물관에 관한 글을 함께 묶은 긴 기고문입니다.
1991년 고양시 대화동(대화4리 가와지 마을) 일대에서 발견된 고양가와지볍씨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재배볍씨입니다. 이 볍씨가 발견되기 위해서는 이전에 지표조사와 문화유적 발굴 조사가 진행되야 하는데, 이러한 발굴조사단을 조직한 이가 바로 손보기 교수입니다. 이러한 손보기 교수에 대한 감사함을 담은 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의 특별기고문을 싣습니다.
1. 손보기 교수의 큰 업적
오는 7월 7일은 고양 가와지볍씨를 발굴하게 하고 볍씨박물관 건립에 큰 가르치심을 주신 파른 손보기 교수님(1922~2010)의 탄신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고양특례시에 살고 있는 시민들 가운데 손 교수의 구석기와 독립사 연구업적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이 있겠지만, 정작 우리 고양시의 정체성을 바로 잡고 세워 준 “고양 가와지볍씨”를 발굴하도록 하여 주었고, 또한 박물관이 건립되어 오늘이 있도록 큰 가르침을 주신 업적을 알고 있는 분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파른선생은 민족사학의 중심에서 독립정신을 교육한 휘문중학·연희전문 문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면서 민족역사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시고, 광복되면서 서울대학교 사학과·대학원 1회로 석사학위를 받으시고, 바로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전임강사로 교수의 직을 시작하였다.
그 뒤 한국학연구의 세계적 명문교인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UCB) 사학과에서 영광스러운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 귀국하고(′63), 그 다음 해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부임한다(′64.3). 같은 해 손 교수 자신이 같이 찾은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의 조사단 단장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구석기유적 첫 발굴을 성공리에 마치고, 그 다음 해 연세대 박물관 초대 관장으로 부임하여 석장리유적과 제천 점말 용굴발굴과 연구를 통하여 우리나라 구석기연구의 첫 장을 열어 놓았다(′65~′81).
연세대 퇴임(′87.8) 후 한국선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일산 신도시 문화유적조사단을 조직하여(′91), 1지구는 자신의 연구소팀, 2지구는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팀, 3지구는 단국대학교 박물관팀으로 구성하여 조사에 착수하고자 하였다(′91.5.7).
이 조사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해보지 못한 계획 발굴이어서 문화재위원회의에서 1차 부결되었지만, 손 교수는 문화재 위원들께 이 조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2차 심의를 통과 · 착수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면 손 교수는 왜 이 문제에 이렇게 집착하였을까?
손 교수는 우리나라의 선사고고학 연구에 모두 유적 중심으로 진행되어서, 그 유적속에 남겨진 유물과 유구-집터 등에 대한 조사에 멈추어 있음을 한계로 지적하여 온 손 교수는 이러한 조사는 인간생활의 주요 3대 요소인 의-옷, 식-먹거리, 주-집터의 연구에서 1/3에만 멈추어 있으니, 우리들께 연구의 외연확대를 여러 차례 주문 · 주장하셨다.
실제로 손 교수는 팔당댐 수몰지역조사의 일환으로 연세대 박물관팀이 발굴한 양평 양근리유적조사(′70.7~8)에서 2,500년 전의 민무늬 토기 밑바닥에 박힌 자국이 당시 사람들의 중요한 먹거리인 콩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필자와 함께 학계에 발표하였다(′72). 그 뒤 연세대 사학과 제자가 백령도의 조갯더미유적에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의 밑바닥에 박힌 흔적을 긴 벼(인디카)의 볍씨 자국이라는 사실을 발표하여 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 연구로 신석기시대에 쌀을 먹거리로 하였음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자료임을 확신하고 있는 손교수는 이번 일산신도시조사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선사시대 사람들의 최대 먹거리인 쌀과 콩에 대한 연구의 단초를 열고, 여기에 대한 고고학적 실물의 확인 과정을 통하여 특히 쌀-벼를 찾고자 하는 큰 계획을 세우고 우리 조사단 모두에게 주의와 관심을 특별히 부탁하면서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충북대팀의 30여명이 넘는 학생대원 가운데 여학생들은 김수원 선생의 집을 중심으로 방과 마루에서 숙박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남학생들은 헛간과 천막에서 잠자리 문제를 모기와 함께 씨름하여야만 하면서 볍씨를 찾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위와 같은 어려운 조사에 충북대팀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구성원은 공주 석장리 구석기유적의 1차~10차(′64~′74)발굴에 참여해 온 4명(김기용·김윤성·양인석·박홍래님 등)의 참가이었다. 석장리 발굴에 10년간 참여하여서 우리나라 최고의 구석기발굴 요원으로 평가되는 그들은, 여러 차례 어려운 발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정말 세밀한 발굴방법으로 조사를 진행하여 이들이 대표인 김기용님이 볍씨 한 톨을 찾게 되었고, 석장리 팀들이 철거 집들에 남겨진 플라스틱 목욕탕 통을 이용하여 만든 물체질방법으로 11톨의 볍씨를 찾아 모두 12톨이 되었다. 이 볍씨들이 오늘날의 가와지볍씨의 첫 출발이다.
이 볍씨를 찾은 사실을 제일 먼저 보고하였더니,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우리도 가장 중요한 볍씨를 찾았군요”라고 하면서, 볍씨와 함께 출토된 토탄시료를 미국에 보내기 위하여 손 교수는 직접 차를 김포공항으로 몰고 가셨다.
이 자료가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베타연구소에 도착한 것은 6월 13일이었고, 한국으로 결과를 보고하기는 19일로 자료에 소개되고 있다. 모두 ‘손보기’ 교수의 이름(“Pokee Sohn, Corea Institute of Prehistory”)으로 자료가 접수되었고 처리되었다.
손 교수는 이들의 자료를 중심으로 6월 24일 발굴 발표회 현장에 김원용 교수(고고학)와 허문회 교수(벼-볍씨) 2분을 초빙하여 갖었는데, 여기에 관한 자료가 『조선일보』 문화면에 크게 보도되었다.
지금까지 선사시대 곡물의 실체 파악에 어려움을 겪었던 끝에 드디어 충북대학교 팀의 노력으로 볍씨를 찾게 되었고, 이 볍씨의 연대가 5,000년이라는 사실에 더욱 만족해하셨다.
손 교수는 이렇게 어렵게 한 조사단의 발굴 · 연구결과를 묶어서 『일산 새도시 개발지역 학술조사보고 1:자연과 옛사람의 삶 – 자연환경 조사·고고학 발굴보고-(465쪽)』와 『일산 새도시 개발지역 학술조사보고 2:일산사람들의 삶과 문화-역사·민속 조사보고-(351쪽)』 2권의 책을 엮어내면서, 역사적인 이 구제발굴 조사에 앞서는 구체적인 밑그림과 그 연구결과를 학계에 보고하여, 훌륭한 큰 업적을 제시하여 모범을 남기셨다.
오늘의 이 시점에서 파른 손보기 교수의 업적을 재조명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출발점을 만들어 주시고, 그리고 큰 격려를 주시어 조사·연구 업적을 국내외 학계에 발표하고 박물관 건립에 좋은 가르침에 주셨음에 깊고 깊은 사의를 드리고자 하는 바이다.
2. 고양 가와지볍씨 조사·연구와 박물관
손보기 교수의 큰 배려와 격려로 참가한 충북대학교팀은 1차(′91.5.8~7.15, 69일간)에 가와지유적(전 일산2지역) 1지구를, 2차(′91.7.27~8.28, 33일간)에 가와지 2지구(사진 3)와 3지구, 3-1지구를 조사하였다.
1·2차 발굴조사 이후 있었던 주요 행사를 사안별로 간략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92년도에 발굴보고서의 형식으로 첫 논문을 발표한 뒤, ′94년도에 첫 학술회의를 고양문화원(당시 원장 이은만)과 고양 가와지볍씨의 중요성을 밝히는 논문 3편을 발표하였다. 일본의 주요신문인 마이니찌신문에 ‘5000년 전의 쌀 출토 <한국>- 조선반도 최고, 일본의 쌀 루트에 파문’이라는 제목으로 1면과 12면에 그 내용이 크게 보도되어서 가와지 볍씨의 위상을 높이게 되었다(사진 4).
∙고양 가와지볍씨를 우리나라 벼의 육종학적 발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박태식 박사(당시 농촌진흥청 연구관)의 제언으로 연구가 진행된 가와지 Ⅱ형(3,000년 전) 볍씨의 과학적 분석연구를 『성곡논총』에 발표하여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이어서 가와지 Ⅰ형(5,000년 전)볍씨도 그 이듬 해(′95) 발표하였다.
∙고양 가와지볍씨를 세계 쌀(볍씨)연구의 총본산인 국제미작연구소(IRRI, 필리핀 라스바뇨스 소재)에 전시하여(′96) IRRI에 가장 오랜 볍씨로 소개하게 되며, 이것이 고양 가와지볍씨 국제화의 첫 걸음이다.
∙중국의 ‘제2회 농업고고 국제회의’에 참가(′97.10.24~29)하여 가와지볍씨를 첫 발표 소개하였고, 또한 현지 방송과 인터뷰하여 중국 본토에 가와지볍씨를 처음으로 방영하였다. 그러나 박물관의 첫 개관(2001)과 필자의 청주 소로리볍씨 유적의 발굴(′97~′98,′01)로 하여 10여년 간의 침묵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여기에서 “고양 600년 기념사업”의 이름으로 인하여 유재덕 위원장과 이은만 부위원장의 건의에 고양 가와지볍씨로써는 구세주같은 최성 시장(당시)이 이 의견을 받아서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원장 우종윤)이 조직·주관하여 학술회의(′13.4.29)와 국제회의(′13.12.3~9) 행사로 가와지볍씨가 다시 고양시민들의 주목과 관심을 갖게 된다.
최성 시장은 이어서 다시 박물관을 리모델링하고, 이름을 “고양 가와지볍씨 박물관”으로 재개관하면서(′14.3.19, 사진 5), 필자를 박물관 명예관장으로 위촉하고, 박물관의 학술활동을 열심히 하도록 당부하였다.
∙이 박물관은 각기 2회의 국제회의와 학회(고조선 단군학회·한국박물관학회)를 가졌고. 재개관 이후 매년 연구 책자를 발표하여 현재까지 10권의 책자를 출판하였고, 또한 3회의 특별전을 개최하여, 박물관과 학문 연구기관의 역할과 활동을 널리 보여 주고 있다.
∙고양 가와지볍씨의 조사와 연구를 진행한 충북대학교는 그 뒤 충주 조동리볍씨(8,000년 전)와 청주 소로리볍씨(15,000~17,000년 전)를 찾아.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벼의 진화·발전 연구에 획기적인 연구성과를 얻게 하는 시발점과 기본축이 되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고양 가와지유적의 조사와 볍씨연구는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세계학계의 볍씨연구의 중요한 이슈와 연구테마를 제시하였다고 하겠다.
그래서 ‘충북대학교 가족’들이 우리나라 벼의 기원 · 진화에 관한 논문과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있음을 이들의 분석 자료로 보아도 실제와 같음을 증명하고 있다. 고양 가와지볍씨 연구의 30년은 ‘충북대학교 가족’들의 연구로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고양 가와지볍씨 박물관과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은 그 뒤에도 가와지볍씨의 연구결과를 계속 발표하여 모두 10권의 책을 출판하여, 거의 매년 1.2권을 세상에 내어 놓은 셈이다.
이렇게 업적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열정적인 격려와 후원을 주신 최성 시장을 비롯하여, 권지선·정종현·송세영 전 소장님들과 현 이도연 소장의 큰 배려에 힘입은 바가 크다. 또한 도시농업과 황수경·소재식·정인철·이영애 과장들은 헌신적인 노력과 열성을 보태주었고 실제적으로 실무를 추진한 강덕자·추미애·정현덕 팀장들은 궂은 일들을 도맡아 하여 주었다.
여기에 늦게 입사한 정현진 학예사는 오로지 박물관일에만 정진하여. 등록박물관의 인가를 얻으며 매년 특별전과 함께 연구보고서를 낼 수 있도록 섬세한 노력을 보태고 있음에. 우리 모두 칭송을 다하고 있다.
발굴한지 30년이 되는 작년에 이를 세상에 다시 환생시킨 최성 시장(당시)의 업적처럼 큰 일을 계획하고 추진한 장본인은 이길용 고양특례시의회 의장이다. 그는 고양의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해서 박물관 운영자문위원이 되기를 자청하였고, 큰 일을 이루고자 하였다.
고양시 이재준 시장은 이길용 의장의 제언을 흔쾌히 받아. “고양 가와지볍씨발굴 3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탑 준공을 서두르고 있다. 아마도 청주 소로리볍씨 기념탑에서 좋은 자극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고양시민은 역시 역사를 알고 문화를 사랑하는 위대한 시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