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스케치 동아리 ‘어반으로 어울림’

도시공간 그리는 재미에 푹 빠진 사람들
재개발 진행되는 원당1구역 풍경 스케치
80년대 형성된 연립주택마을, 곧 철거 
“사라져갈 풍경·기억 그림으로 남기고파”

철거가 예정된 원당1구역 골목길에 모인 ‘어반으로 어울림’ 회원들. (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정상례, 김진숙, 이지수, 박미숙, 안수정, 조용남, 안주옥 회원.
철거가 예정된 원당1구역 골목길에 모인 ‘어반으로 어울림’ 회원들. (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정상례, 김진숙, 이지수, 박미숙, 안수정, 조용남, 안주옥 회원.

[고양신문] 신문사가 자리한 고양시청 앞에서 멀지 않은 주교동 원당1구역 재개발사업지. 원당초등학교와 밀양박씨 선산이 있는 두응촌 사이에 1800여 세대가 모여있는 연립주택마을인 이곳은 현재 절반 넘는 주민들이 이사를 했다. 15년 가까이 설왕설래 무성했던 재개발사업에 마침내 가속도가 붙어 오는 9월까지 이주가 완료되면 본격적인 철거작업이 시작되고, 이내 고층 아파트 단지로 변모할 예정이다.   

사람 사는 공간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새 모습을 갖추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순리지만, 주교동 연립주택마을이 영영 사라진다 생각하니 아무래도 섭섭함이 앞선다. 서울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던 1980년대, 고양에서 가장 먼저 택지개발이 진행돼 비슷한 규모의 연립주택들이 동시에 들어섰던 곳이 바로 이 마을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원당1구역에는 80년대 서울 외곽 도시의 전형적 주거형태와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저층의 연립들 사이로 반듯한 골목길이 바둑판처럼 교차하고, 한쪽에는 옛 자취를 간직한 한옥들도 남아있고, 마을버스가 지나는 큰길가에는 수퍼와 세탁소, 분식집 등 서민들의 일상을 이루는 가게들이 이어지고, 담장 안 좁은 녹지에는 목련, 은행나무, 측백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정원수가 지긋한 시간을 지키고 서 있다.   

주교동행정복지센터에서 열렸던 '우리 마을을 그리다' 전시 모습. 
주교동행정복지센터에서 열렸던 '우리 마을을 그리다' 전시 모습. 

반가운 마음에 찾아간 소박한 전시 

겨우 40여 년밖에 안 된 평범한 연립주택마을을 특별하게 기억할 이유가 있겠냐 싶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60년대부터 숨 가쁘게 달려온 근대화와 경제개발의 열매를 막 취하기 시작했던 시절이 만들어낸 상징적 주거 경관이 아닐 수 없다.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어떤 형태로든 기록화 작업을 하면 좋을텐데, 하는 조바심을 안고 틈날 때마다 주교동 골목을 산책했고, 가끔은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지난달에 주교동행정복지센터에서 ‘우리 마을을 담다’라는 타이틀의 어반스케치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솔깃한 마음으로 찾아간 전시는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웠다. 높은 완성도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그림 속에 담긴 장소들이 어디인지 머릿속에 환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전시를 담당한 주교동 공무원의 도움으로 그림을 그린 ‘어반으로 어울림’ 동아리 회원인 정상례씨와 연락이 닿았고, 기자의 취재 요청에 흔쾌히 약속을 잡아줬다. “다음 주 금요일에 야외 스케치를 나가요. 그날 오시면 됩니다.”

함께 모이지만 그림은 따로따로 

약속장소인 추원재(원당1구역 사업지에 있는 밀양박씨 재실) 근처. 약속시간이 되니 그림 도구와 아웃도어용 간이의자를 챙겨 든 이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는 각각 흩어져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누군가는 가는 펜으로 세밀한 선을 그린다. 그런가 하면 붓끝에 물감을 찍어 밑그림이 마무리된 도화지에 색을 입히는 이도 있다. 

풍경과 도화지를 번갈아 응시하는 눈길은 진지했고, 각자의 스타일로 선을 그리는 손길은 하나같이 평안해 보였다. 기자 역시 혹시라도 그림작업에 방해가 될까봐 발걸음을 조심조심 옮기며 회원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정중동(靜中動)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무것도 없던 도화지 위에 한점 정겨운 풍경화가 완성되어간다. 신기하고 멋졌다. 

가을까지 그린 후 전시·책자 계획

무더위를 피해 원당도시재생사업 거점공간인 배다리행복나눔터 2층 교육실로 장소를 옮겼다. 이곳에선 실물 대신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참조해 작품을 마무리한다. 장소는 달라졌지만 몰입도는 여전히 높다. 잠시 쉬는 틈을 타 궁금한 얘기들을 물을 수 있었다. 정상례씨의 설명이다.

“지난 겨울 원당도시재생사업 프로그램으로 어반스케치 강좌가 진행됐는데, 주최 측도 참가자들도 만족도가 높았어요. 그러다가 재개발로 사라질 원당1구역 풍경을 그림으로 남겨보자는 제안이 나왔고, 어울림누리에서 어반스케치를 배운 팀들이 합류해 ‘어반으로 어울림’ 동아리를 만들고 5월부터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회원들은 모두 12명. 기자가 찾아간 날에는 8명의 회원들이 모임에 참석했다. 주교동 원흥동 성사동 행신동 등 사는 곳은 서로 달라도 하나같이 이제 막 어반스케치에 재미를 붙인 아마추어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솜씨는 벌써부터 소문이 나 마상공원 작은도서관과 주교동행정복지센터의 전시가 이어졌다. 정상례씨는 “가을까지 주교동 구석구석을 그림으로 그린 후 전시도 열고 책자도 만들어 이웃들에게 소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가볍지만 풍요로운 어반스케치의 매력

우리말로는 ‘도시 그리기’로 옮길 수 있는 어반스케치는 미국과 유럽에서 일상과 예술이 접목된 문화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했다. 수년전부터는 우리나라에 소개돼 현재 도시마다 ‘어반스케처스’라는 공식 모임이 만들어지고 있고, 고양에서도 5월에 ‘고양어반스케처스’가 출범해 150여 명의 회원들이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어반으로 어울림’ 회원들 역시 고양어반스케처스, 나아가 국제어반스케처스의 일원인 셈이다. 

이들은 어떤 계기로 어반스케치를 시작했을까. 등산과 사진을 좋아했던 이지수씨는 “산에서 연필로 쓱쓱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보고 매력을 느껴 어울림문화센터를 두드렸다”고 말했고, 화가가 어릴 적 꿈이었다는 조용남씨는 “생업을 위해 미뤄뒀던 꿈을 정년 퇴임 후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꺼내들었는데, 너무 행복하고 즐겁다”고 말했다. 

수년 전 수채화로 그림을 시작했다는 안주옥씨는 “작은 종이와 펜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어반스케치가 커다란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보다 오히려 더 다채롭고 흥미롭다”고 말했고, 박미숙씨 역시 “자신의 취향에 맞는 간단한 도구를 가지고 어떤 장소나 대상을 짧은 시간에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게 어반스케치의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여행을 좋아한다는 안수정씨는 여행의 추억을 좀 더 멋지게 기억하기 위해 어반스케치를 택했다고 한다. 안씨는 “여행지에서 느꼈던 힐링과 행복의 순간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골목길 풍경 

사라져가는 원당1구역의 풍경을 그리는 것은 이들에게도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지금 그리고 있는 경관이 얼마 후면 영영 사라지기 때문이다. 한영교씨는 “주교동은 아파트단지와 달리 누군가의 삶의 흔적들이 구석구석 배어있는 곳”이라고 말했고, 이지수씨는 “그림의 대상으로 점찍고 차분히 관찰하면 비로소 숨은 매력이 보인다”며 주교동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 

조용남씨 역시 “주교동 골목처럼 쓸모를 다해 버려진 사물이나 건물 등이 오히려 다채로운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에 훌륭한 미적 대상으로 승화될 수 있다”면서 “스케처스의 시선으로 골목을 거닐면 내가 더 풍요로워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개개인의 미적 욕구, 또는 보다 풍성한 일상의 취미를 위해 시작한 어반스케치지만 어느덧 ‘어반으로 어울림’ 회원들에게는 공통의 목표와 바람이 생겼다. 
“사라져가는 한 마을의 풍경과 기억이 우리들의 그림 속에 담겼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곳에 거주했던 분들이 언젠가 우리가 그린 그림들을 보고 ‘맞아, 우리가 살던 동네가 이랬지…’ 하며 추억을 떠올려 주신다면 참 기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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