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혜의 발랑까진]
[고양신문] 서울시는 축제 참가자의 ‘신체 과다 노출’을 금지하는 조건부로 퀴어문화축제를 승인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한 서울시 관계자는 신체 과다 노출의 기준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느냐, 아니냐가 기준”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서울시의 규제는 ‘면학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여학생의 용모를 통제하는 공교육과 닮아있다. 학교는 특정한 옷차림을 기준으로 여학생을 ‘노는 애’와 ‘그렇지 않은 애’로 구분한다. 학교가 보호할만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구분하고, ‘노는 애’라는 낙인 속에서 차별적 대우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특히 여성 청소년이 자신을 성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낙인과 폄하, 질타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된다.
서울시의 ‘신체 과다 노출’이라는 기준 역시 마찬가지다. 물총축제에도, 머드축제에도 없었던 기준이 왜 퀴어문화축제에만 존재할까? 이 기준은 보호받아야 할 ‘건전한 시민’과 격리시켜야 할 ‘음란한 시민’을 구분하고, 퀴어문화축제를 ‘음란 축제’로 낙인찍기 위해 존재한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느냐’라는 기준은 결국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울시가 요구하는 ‘건전한 시민의 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격리와 낙인,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서울시는 ‘청소년보호법 상 유해물건을 판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또 다른 조건으로 내걸었다. 혐오세력은 “우리 아이들을 에이즈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며, 퀴어문화축제를 ‘청소년에게 유해한 축제’라고 비판한다. “우리 아이들을 퀴어문화축제라는 유해환경으로부터 보호하자”는 생각은 그 자체로, 청소년이 마주하는 억압을 잘 보여준다. 이 사회는 청소년을 아직 인격이 형성되지 않은 미성숙한 존재로 치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청소년의 기준으로 유해함을 구분하여 청소년을 사회적 공간에서 분리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퀴어 청소년은 커밍아웃 이후 “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몰라서 그래”, “경험이 없어서 헷갈리는 거 아냐?”라는 말을 듣곤 한다. 퀴어 청소년의 정체성은 아직 어려서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의 ‘혼동’ 혹은 ‘사춘기의 일탈’로 치부된다. 퀴어 청소년의 인권은 있는 그대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비청소년이 인정해야 하는 것으로 둔갑한다.
청소년은 성을 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성에 대한 모든 것은 ‘청소년에게 유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테면 ‘콘돔’은 성인용품이 아닌 의료용품임에도, 유해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청소년에게 판매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유해한 것은 퀴어도, 섹슈얼리티도, 성도 아니다. 정말 유해한 것은 청소년을 성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자신의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을 존중할 수 없게 만들며, 성을 경험할 권리를 박탈하는 사회다.
이제는 청소년보호법 상 유해물건으로 지정된 성 관련 물품들이 정말로 ‘유해’한지 검토할 때다. 십여 년 전에는 ‘동성애’가 청소년유해매체물 기준에 등장했다. 이처럼 청소년유해매체물의 기준은 ‘유해함’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적 통념에 기반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청소년이 쾌락을 느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돌기형 콘돔, 자위기구 등을 청소년유해물건으로 지정한다. 많은 청소년들이 이를 청소년의 즐거움을 통제하는 ‘쾌락통제법’이라고 칭하며 비판해왔다. 서울시는 단순히 ‘법적 기준을 따르라’고만 말하는 게 아니라, 그간 법이 박탈해온 청소년의 성적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나는 청소년 동료들과 함께 퀴어문화축제에 함께할 예정이다. 청소년이 성적 존재로서 자신을 알아가고, 성적 즐거움을 누릴 권리는 ‘유해함’이 아니라 인권이기 때문이다. 성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 사회와 청소년이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는 애’ 혹은 ‘음란한 시민’이라는 말에 갇히지 않는 아름답고 다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2022년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슬로건은 ‘살자 함께하자 나아가자’다. 몇 년간 우리는 성소수자로 혹은 앨라이로 살아남기가, 함께하기가, 나아가기가 힘겨운 시기를 보내왔다. 코로나19는 소수자에게 더욱 가혹한 위기로 다가왔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미루는 정치 속에서 깊은 절망감과 무력감이 찾아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꿋꿋히 살아가는 시간이 함께하는 용기를 만들었고, 함께하기에 평등의 시대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혐오와 차별의 시대에도 끝끝내 살고, 서로의 손을 잡고, 평등의 시대로 나아가는 우리를 응원한다.
2022년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살고, 함께하고, 나아가는 우리들을 응원하고 축복하는 자긍심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언젠가 고양시 호수공원에서도 퀴어문화축제가 열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