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숙의 그림책으로 본 세상]
[고양신문] ‘벌써?’ 요즘 시계를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일이 늘었다. 하루가 너무 빨리 간다. 24시간이 아니라 25시간이면 좋겠다. 그렇게만 되면 책도 좀 보고, 생각도 좀 하면서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낼 것 같다. 정말 그럴까?
『염소 시즈카의 숙연한 하루』(다시마 세이조 지음, 황진희 옮김, 책빛)는 염소 시즈카의 하루를 담은 책이다. 강에서 만난 메기는 시즈카에게 숙연해지는 노래를 불러준다. 그때부터 시즈카는 ‘숙연하다’는 말이 뭔지 생각하게 된다. 노래 부르던 매미가 갑자기 툭 떨어진다. 개미들이 몰려와 매미를 끌고 간다. 따라가던 시즈카는 거미줄에 알알이 맺힌 이슬방울을 본다.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매미와 이슬에 대해 생각하던 시즈카는 두꺼비와 메추라기를 만나 ‘질문’을 한다. 하지만, 너무 바쁘고 급한 두꺼비와 메추라기. 시즈카가 문득 고개를 드니 꽃봉오리가 보인다. 시즈카는 아무 생각 없이 꽃봉오리를 덥석, 먹어버린다. (신간이라 내용은 여기까지만 소개한다)
시즈카의 질문을 떠올린다. ‘아침 이슬은 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반짝일까?’ ‘매미는 죽으면 노래하지 않는 걸까?’ 아름다움에 대한 고민, 죽음과 예술에 대한 생각. 깊은 생각에 빠졌던 시즈카지만, 결국 눈앞에 바로 핀 꽃봉오리를 먹어버린다. 삶은 원래 그런 거야 말하는 것 같다.
나에게 질문한다. ‘아침 이슬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반짝이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걸까?’ ‘예술도 죽는 게 가능한가?’ 잠깐 생각에 빠졌지만, 눈앞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에는 어제 쓰다 만 사업계획서 반쪽이 남아있다. 나도 모르게 키보드에 손가락을 갖다 댄다. 두드린다. 바쁜 삶 어느 한 틈에 ‘숙연’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숙연하다’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엄숙할 숙(肅), 그러할 연(然).
한자말을 풀어본다. ‘엄숙할 숙(肅)’자는 ‘수놓다’가 본래 뜻으로 자수를 놓으려고 붓을 잡고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본뜬 것이다. ‘수를 놓으려고 붓을 잡고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라니. 나는 수를 놓지는 않지만, 가끔 그림에 채색을 하기 전, 밑그림을 그릴 때가 있다.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한다. 눈을 가만히 감았다 뜬다. 그리고 눈 끝을 연필심으로 집중한다. 다시 크게 숨을 들이켜고 선을 그어간다. 그냥 집중한다는 말로만 표현하기 아까운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이 바로 ‘숙연’한 때는 아닐까?
사실,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도 된다. 잠깐의 집중. 잠깐의 호흡. 그리고 잠깐의 손놀림이면 된다. 그렇게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숙연한 하루가 되기도 하고, 그냥 지나가는 하루가 되기도 한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루란 그냥 숫자로 매겨진 24시간이 아니라, 내 삶의 한 조각이다. 이슬의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하고, 노래하던 매미에 대해 생각하고, 그렇게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쌓아가는 과정이 삶이다.
염소 시즈카는 자기도 모르게 꽃봉오리를 먹어버리고 눈물을 흘린다. 이슬과 매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없었더라면 흘리지 않았을 눈물인지 모른다.
나는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는가? 한 틈이라도 숙연한 때가 있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