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자
김경윤 인문학자

[고양신문] 해뜰녘과 해질녘의 박명(薄明)의 시간을 프랑스에서는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고 합니다. 밝음과 어둠이 혼재되어 있기에 사물의 식별이 어려운 시간대, 그래서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이 자신에게 꼬리를 흔들 개인지, 자신을 물어버릴 늑대인지 분간이 안 되는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시간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기 오는 저 존재가 개일까요, 아니면 늑대일까요? 우리는 안녕한가요? 지금까지 살아왔던 이대로 이렇게 지내면 삶이 괜찮을까요? 아직 어둠이 짙어진 건 아닐가요? 아직도 어두운 밤일까요?

이렇게 개 주인의 시선에서 이 시간대를 상상하다가 문득 오싹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주인이 아니라 개가 아닐까하는 상상에 미쳤기 때문이었는데요. 상상은 더 뻗어나가 혹시 우리 모두는 이제 개가 된 것이 아닐까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주는 먹이에 길들여져, 주인이 아무리 이상한 짓을 하더라도, 심지어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짓을 하더라도 결코 주인을 물지 못하는, 낑낑대기만 하는, 그러다가 먹이라도 던져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꼬리를 치며 주인 주변을 맴도는, 야수성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그렇게 죽을 날까지 개로만 살 수밖에 없는 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소름끼치는 상상을 말입니다.

그러다가 나는 언제부터 개가 된 것인지 자문합니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돈을 벌어야 하고, 빚을 갚아야 하고, 이사를 가야하고, 저축을 해야하고, 내 집을 마련해야 하고,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하고, 멋진 곳으로 여행을 가야하고, 또 뭐가 있더라? 이건 아닌데 싶은데도 눈 감아버리고, 참고 견디는 게 어른의 모습이지 합리화하고, 괜히 앞장서다가 나만 다칠 수 있어 두려워하게 되고, 내가 아니어도 해결할 사람이 있을거야 책임전가하고, 세상에 나쁜 놈이 어디 한두 놈인가, 이 정도 나쁜 짓은 악행도 아니지 뭐 정당화하고, 그러던 사이에 나는 개가 된 것일까요?

“개가 뭐가 어때서? 등따수고 배부르면 그만이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 얻어서 편안하게 지내면 장땡이지. 사회정의니, 성평등이니, 기후정의니 목소리 높이고 거리에 나선들 세상이 눈 하나 깜짝 하더냐. 오히려 미운 털만 박히고, 왕따 당하고, 승진에서 밀려나고, 자칫 잘못하면 밥줄도 끊기는데. 그냥 개로 살아도 돼”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개가 된 것일까요?

한때 나도 늑대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고, 불의한 것에 저항하기 위해 거리를 나서고, 분노의 이유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물고 뜯고, 싸우다가 입은 상처로 겁먹지 않고, 더 강해지기 위해 더 악조건으로 몸을 던졌던 적이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신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 믿지 않고,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리라 다짐했던 자유의 정신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억압하여 얻게 되는 권력을 거부하고, 상대방과 함께 해방됨으로 권력을 무너뜨리는 꿈을 꾸었던 길들여지지 않은 정신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민주주의 시대가 왔다고, 늑대의 시간이 지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이 각성한 계몽의 시대에 무지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촛불을 꺼버린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수없이 노래했으나 아직도 어둠이 빛을 이기고 있습니다. 눈앞에 닥쳐오는 불길한 조짐들은 더욱더 어둠 쪽으로 우리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주인이야 평온한 개의 시간이 계속되길 바라겠지만, 개 밥그릇은 걷어차인지 오래고 목줄만 더욱 강하게 죄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개도 개로 살 수 없는 시대로 돌입하였습니다. 개의 시간이 끝나갑니다. 늑대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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