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구 전 주 독일대사
정범구 전 주 독일대사

[고양신문] 최근 한 달 반 가량 유럽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코로나 위협이 여전한 상태에서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그로 인한 에너지 위기, 물가 인상, 또 기후변화로 인한 산불, 이상 고온 등 여러 가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매일 빠지지 않는 우크라이나 관련 기사는 전쟁의 참상 뿐 아니라 점차 여러 방면으로 확산되는 전쟁의 영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당장 에너지, 특히 천연 가스의 상당 부분을 러시아에 의존해 왔던 독일은 대 러시아 경제제재 결과로 러시아로부터의 가스 확보가 어려워졌다. 가스 재고 확보에 비상이 걸린 독일 정부는 다가오는 겨울에 대비하는 난방용 에너지 확보 대책과 에너지 가격 안정에 주력하고 있다. 

이 때문에 독일 새 정부가 출범 당시 국정 최우선 과제로 내놓았던 기후변화 대책까지 후퇴하고 있다. 전임 메르켈 정부에서 2038년까지로 잡았던 석탄발전 중단을 가능하면 2030년까지로 앞당기겠다던 새 정부의 약속은 당면한 에너지 난 때문에 조금씩 변질되고 있다. 당장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꼽혔던 갈탄 생산을 10월 1일부터 재개하겠다고 녹색당 소속 경제 및 기후보호부 장관이 발표했다. 갈탄은 발전소용은 물론, 최근 에너지값 인상으로 저렴한 땔감을 찾는, 특히 옛 동독지역의 가정용 난방 연료로 다시 선호되고 있다.

에너지 공급 위기로 인해 사용 연장 논란에 휩싸인 독일의 원자력발전소.
에너지 공급 위기로 인해 사용 연장 논란에 휩싸인 독일의 원자력발전소.

녹색당 소속 튀빙겐 시장은 한발 더 나아가 독일이 올해까지 완전 철폐하기로 한 원자력 발전을 일부 연장하자는 주장까지 들고 나왔다. 보수정당인 기민당이나 자민당에서야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지만 오랫동안 반핵 운동의 구심점이었던 녹색당 소속 정치인이 이런 주장을 들고 나왔다는 데서 독일 사회에 주는 충격이 컸다. 분쟁지역에 대한 무기수출을 강력히 반대해 왔던 독일 사민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주포 대량 지원 등, 자신들의 종래 정책을 완전히 뒤엎는 결정을 해도 이에 대한 독일사회의 저항이 없다.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다? 주요정책을 두고 갈팡질팡하는 독일 사회의 대응을 지켜보노라면 이 모든 것이 코로나에 이어 우크라이나 전쟁 등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세계 정세를 지배하면서 생겨나는 일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시각각 정신없이 변화하는 국제 현실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대응을 보면서 우리도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어느 귀신에게 물려갈지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러나 잠깐 나갔다 들어온 한국은 여전히 시끄럽다. 그런데 그 시끄러운 것들이 당장 국민들이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먹고 사는’ 문제, 또는 안보 문제와는 별반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집단 살인범’ 논란을 빚는 북한 어민 송환 사건, 해수부 공무원 피살사건 등 전 정권에서의 사건들을 뒤지고, 경찰국 신설 문제, 그리고 최근에는 만 5세 입학이나 외고 폐지 문제 등이 충분한 사회공론화 과정 없이 불쑥불쑥 돌출하면서 시끄럽다. 당장 국민들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월급 빼고는 다 오르는 고물가에 무더위, 그리고 최근에는 호우 피해까지, 매일 매일이 힘겹고 짜증스러운데 말이다.

초등학생이 새 학년을 시작해도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한 해 동안 자기가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 계획표를 짜는 일일 것이다. 지난해 부족했던 부분을 보강하고, 해 보고 싶었는데 여건상 미처 해보지 못한 일들, 또 새롭게 해야 하는 일 등등. 하물며 초등학생의 일년 계획에도 우선순위가 있고 원칙이 있을텐데, 한 나라의 운명을 담보하는 정권이나 대통령직에 있어서야 말할 것도 없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인 대한민국이 현재 안팎으로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우선순위를 정해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물 덤벙, 술 덤벙 식으로 마구잡이로 국정을 풀어나가기에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 각박하다. 어떻게 만들어 온 나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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