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모임 중독자의 고백]

김민애 출판편집자
김민애 출판편집자

[고양신문] 초여름의 어느 날. 학과 동기가 과 사무실로 가 보라고 했다. 학교 소식지에 학과 소개를 실을 예정인데, 나보고 인터뷰를 하라는 것. 나를 추천했다는데, 도대체 왜?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할 틈도 없이 정문 근처 스튜디오로 향했다.

나보다 앞서 촬영을 하고 떠난 이는 배우 Y였다. 그때 한창 잘 나가던 재학생 배우였던 터라 표지 모델로 내세운 모양이었다. 조금만 빨리 도착했으면 실물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내 촬영 분량에 대한 설명을 듣느라 아쉬워할 틈도 없었다.

콘셉트는 분명했다. 예비 작가를 꿈꾸는 파릇파릇한 대학생. 책을 잔뜩 쌓아 놓고, 그 위에 팔을 자연스럽게 걸쳐 놓으며 자연스럽게 웃으란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일 못하는 게 바로 그 자연스러운 웃음이다. 소개지에 실을 내용에 맞게 인터뷰도 진행했던 것 같은데, 질문도 대답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 모든 건 학과 입학생을 모집하기 위한 마케팅의 일환이었을 뿐. 별 시덥지 않은 소리를 하고, 세상 부끄러운 사진을 찍히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겨울. 학과 사무실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우리 학교, 우리 과를 지망한다는 고3 학생의 수줍은 고백이었다. ‘언니처럼 그 학교에 가고 싶어요.’ 편지를 받자마자 서둘러 소식지를 구해 읽었다. 오만과 허영에 가득 찬 인터뷰였다. 내용만 보면 이미 난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나 다름없었다. 고작 스무 살 주제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부터 그 친구와 꽤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수험생으로서 고민을 털어놓는 그에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최근까지 편지를 갖고 있었는데, 2년 전 이삿짐을 싸면서 다 정리했다. 확실한 건, 고작 스무 살밖에 안 된 주제에 꼰대 같은 소리와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 말들을 나열한 편지를 보냈을 거라는 사실이다. 나를 멘토로 삼고 싶다는 그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었으니까. 말끝마다 후배가 되고 싶다는 그에게 난 희망을 심어 주었을까? 입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을까? 

그는 내 후배가 되지 않았다. 원하는 학과에도 합격하지 못한 듯하다. 재수를 했는지, 그해 성적에 맞추어 진학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어설프게 위로와 격려도 했을 텐데, 사실 그 당시의 내 삶을 감당하기도 어려웠기에 다른 이의 슬픔을 귀담아 들을 여유가 없었다. 내가 1년 휴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와의 연락도 끊겼다. 

누군가 나를 동경했더라는 기억이 자만이었다는 걸,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깨달았다. 자신의 시를 봐 달라고 청하는 일면식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릴케의 한없이 따뜻한 답장. 

‘아무도 당신에게 충고를 하거나 도와줄 수 없습니다.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단 하나의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십시오. 당신에게 글을 쓰라고 명령하는 근거를 찾아내십시오. 그것이 당신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펴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글쓰기를 거부당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를 스스로에게 고백해 보십시오.’

물론 아무것도 이뤄 낸 것 없는 스무 살의 나를 열아홉 살에 첫 시집을 출간한 릴케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것은 상대를 대하는 마음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어쩌면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지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정중한 마음. 최선의 마음. 그 후로 20년을 더 살았지만 여전히 내가 갖지 못한 마음의 깊이. 

‘진심으로 보여 주신 커다란 신뢰감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저로서는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솔직히 대답함으로써, 사실은 아직 면식이 없는 사람이면서도 얼마간이나마 신뢰감에 어울리는 자가 되려고 애썼던 바입니다.’

릴케의 이런 마음이 나를 뒤흔든다. 스무 살 때로 돌아가서 그 친구에게 다시 편지를 써 주고 싶다. 겉멋 들이지 않고 솔직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대한민국 고3의 긴 터널을 무사히 잘 빠져나올 수 있는 위로의 말들을 신중하게 적어 주고 싶다. 그래서 20년 후 나와 그 친구 모두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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