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구 전 주독일 대사
정범구 전 주독일 대사

[고양신문] “아, 옛날이여~”
나이를 한 두 살 더 먹어가다 보니 속으로 이런 한탄을 되뇌게 될 때가 있다. 아무래도 과거 현역 시절의 분주함과 성취감이 그립고, 당시에는 힘들었을지 모르지만 세월과 함께 아스라해지는 추억들이 과거를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포장해서 그럴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최근 프랑스, 스웨덴, 이탈리아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선거를 통해 극우세력들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리하여 유럽 정치에서 이제는 사라진 것으로 믿었던 구호들이 다시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새삼 지나간 호시절들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만 간다.

지난 6월 프랑스 총선에서 마린 르펜이 이끄는 극우정당 ‘국민연합’이 제2야당으로 약진한 데 이어 9월 11일 치러진 스웨덴 총선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와 반이민 정서를 등에 업은 극우성향의 ‘스웨덴 민주당’이 오랜 집권여당이었던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제치고 정권장악에 성공하였다. 유럽 사회민주정당들의 메카로도 불려왔던 스웨덴에서 극우정당의 집권은 가히 충격적이다.

스웨덴 극우정당 ‘스웨덴 민주당’의 총선 돌풍을 보도한 AP통신 화면.
스웨덴 극우정당 ‘스웨덴 민주당’의 총선 돌풍을 보도한 AP통신 화면.

유럽정치의 우경화는 지난 9월 25일 치러진 이탈리아 총선에서 그 정점에 달했다. 무솔리니 이후 최초로 새로운 파시스트 정당인 ‘이탈리아 형제들’이 제1당으로 등극하면서 우파연합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반 이민, 반 이슬람, 반 동성애, 반 낙태 합법화 등, 과거 유럽사회가 오랜 논쟁을 거쳐 어렵게 이루어낸 사회적 합의들을 되돌려 놓으려는 구호들을 통해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중동이나 아프리카로부터의 끝없는 난민 유입, 실업률의 증가, 인플레이션 심화, 코로나 등등 이탈리아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으로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증오나 배제가 동원된 것이다. 

이탈리아 극우정당 ‘이탈리아형제들’의 조르지아 멜로니 대표.
이탈리아 극우정당 ‘이탈리아형제들’의 조르지아 멜로니 대표.

그러나 이탈리아 총선 결과는 “이탈리아 최대 정파는 무당파”, 즉 투표에 참가하지 않은 기권자들이 다수라는 말에서 보이듯 전반적 정치적 무관심의 결과라는 평도 있다. 문제를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정쟁으로 날을 지새는 정치권을 향한 혐오가 이런 극우정당의 약진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이탈리아 총선 투표율은 4년 전(74%) 보다 현저히 낮은 64.1%를 기록하고 있다. 

유럽 극우정당들의 약진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당면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합리적 대안을 내놓기보다는 어딘가에서 분풀이 대상, 이른바 ‘희생양(scapegoat)’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실업문제를 경제정책 수정을 통해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난민들 책임으로 몰아간다던가, 사회적 문제들을 성소수자나 낙태 합법화의 책임으로 돌려 버리는 식이다. 문제 해결은 복잡하지만 선동은 간단하다. 해법을 요구하는 민중의 분노는 급하지만 해법 마련이 간단하지 않으니 누군가에게 책임을 미루며 대중들의 분노에 올라탄다.

우리사회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환율과 물가, 금리가 치솟고, 시장에서는 당장 배추김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시민생활이 위협받고, 기후위기는 이제 초등학생 아이들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일상적 위기가 되었지만 이런 문제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지한 해법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들려 오느니 서해 피랍 공무원 문제가 어떻느니, 그래서 감사원이 어쨌느니 하는 이야기들 뿐이다.

심지어는 강릉에서 민가 근처에 잘못 떨어진 국산 미사일도 전임 정부의 9.19 합의 때문에 그랬느니 하는, ‘희생양 만들어내기’ 일색이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던 김대중 정부 이래 문화정책도 한 고등학생이 그린 만평에 정부가 나서서 노발대발하는 지경으로 뒤집혔다. 

‘대안’과 ‘해법’을 이야기하는 정치가 보고 싶다. 정말 “노 빠꾸(No Back)!”를 외쳐보고 싶은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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