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금정굴 합동위령제에 다녀와서
[고양신문] 가을 아침 공기는 서늘했지만 하늘은 맑았고 햇볕은 따스했다. 곧게 뻗은 나무 잎사귀 사이로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이 쏟아져내리는 듯했다. 그 아래에서 낡은 은박 돗자리를 펴 놓고 제사상을 차리는 유족회 분들의 모습은 여느 집 제사 상차림 분위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과일을 어떤 방향으로 몇 개 놓느냐, 제기는 제대로 닦았느냐 등 서로를 위하기도 타박하기도 하는 모습이 형제자매 같아 정겨웠다. 언성을 높이는 일 없이 각자 일을 분담해서 차분히 제사상을 준비했다.
11시 정각. 숲속에 낮은 음색의 제례악이 깔리면서 본격적으로 위령제가 시작되었다. 초헌과 함께 고유문이 낭독되니, 그제야 위령제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등 뒤에서 날아온 총알이 팔과 다리, 심장, 머리를 뚫고, 빗맞아 아직 목숨이 붙어 있던 분들도 산 채로 금구덩이에 떨어졌다”는 대목에서는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70년 넘게 이 상처를 보듬은 채로 합동 위령제를 지내고 있는 가족의 마음을 내가 감히 헤아릴 수나 있을까 싶었다.
초헌과 아헌, 종헌이 끝나고 유족이 차례차례 제배를 하는 순서가 되자 기어이 누군가 오열을 터뜨렸다. 당시 대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던 딸아이가 이제 여든이 다 되었는데도 아버지를 가까이 모시지 못하고 있다는 설움이 어찌 북받치지 않겠는가. 처음 유골이 발굴될 때만 해도 이렇게 30년째 합동 위령제를 지내게 될지 상상이나 했을까.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울음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코로나19 때문에 3년 만에 치르게 된 합동 위령제. 다른 지역의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에서도 찾아와 고양유족회를 위로하였고, 지역 시의원, 도의원도 몇몇 참석하였다. 국회의원 중에서는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유일하게 참석하였다. 이 지역과 상관없는데도 참석해서 끝까지 자리를 지켜 준 점이 고맙게 생각되면서도, 그가 일산 지역구가 아니기에 평화공원이 조성되는 데 무슨 힘이 되어 줄까 하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재준 전 고양시장은 초반부터 참석하여 마지막까지 함께했다. 현 시장과 시의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고양시장은 추도사도 보내지 않았다. 이 금정굴 현장이 앞으로도 제대로 보존될 수 있을지, 세종시 추모의 집에 모셔 놓은 금정굴 영령(유해)을 고양시로 모시고 올 수는 있는 것인지, 평화공원은 과연 조성될 수 있을지 암담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이번 위령제에서는 따스한 기분을 여러 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추모비에 올려놓은 듯한 사탕 두 개에서라든지. 행사 관계자의 SNS를 우연히 보고 일부러 황룡산을 찾아 아들과 함께 위령제를 찾아온 시민이라든지. 주말마다 숲놀이를 하는 유치원에서 일부러 역사의 현장을 보여 주기 위해 시간을 맞춰 황룡산을 방문한 선생님과 아이들이라든지. 유족인 할머니의 손을 찾고 위령제를 방문해서 안내문을 읽는 손자의 뒷모습이라든지. 추모공연을 하러 온 공연자가 울컥해서 눈물 젖은 목소리로 상주아리랑을 불러 유족과 시민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든지. 등산을 하러 온 시민이 방명록을 쓰고 자연스럽게 위령제에 참여하는 모습이라든지.
이런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며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는지 모른다. 역사의 진실과 상관없이 평화공원으로 가는 길은 더디더라도 평화꽃의 씨앗들은 시민들의 마음 여기저기에 가득 뿌려졌음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족 중 한 분은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위령제 현장에 오르지 못하고 황룡산 입구에 주저앉아 손님을 맞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제사의 예를 갖추고 싶어하는 마음이 존경스러웠다. 학살이 있은 지 72년. 당시 어린아이였던 유족의 나이가 여든을 훌쩍 넘기고 있다. 평화공원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고 이들에게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추모곡으로 ‘얼굴’을 불렀던 헬로유기농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계속 맴돈다.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유족들이 그렇게 그리워하는 얼굴을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서로 행복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평화꽃으로 가득 피어 있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