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고양신문] 지난 금요일에 울금 수확을 끝냈다.
십년 넘게 울금농사를 지어왔지만 시월 하순에 울금을 수확하기는 올해가 처음이다. 울금은 된서리를 맞고 잎이 누렇게 쇠어야 약성이 좋아지기 때문에 통상 십일월 초순에 수확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올해에는 시월 이십일 경에 된서리가 내리는 바람에 보름가량 수확이 앞당겨진 셈이다.
수확을 끝낸 울금을 하우스 안에 쟁여놓고 보니 수확량이 확실히 예년만 못하다. 그래도 올해처럼 기묘한 날씨에 이 정도 수확을 했으면 꽤나 선방한 셈이다. 극심한 봄 가뭄에 보름 남짓 싹이 늦게 튼 것도 모자라서 가을 가뭄까지 겪다가 시월 하순에 생이 꺾여버렸는데도 평균수확량의 칠십 퍼센트를 넘겼으니 이만하면 농사 잘 지었다는 생각이 절로 일었다.
그런데 문제는 예상치도 못했던 양파 밭에서 생겼다.
원래 양파는 팔월 말이나 구월 초에 직파를 하면 시월 중순이나 하순에 모종을 사다 심는 것보다 훨씬 강하게 살아남는다. 작년에도 양파 밭의 절반은 직파를 하고 나머지 절반에는 모종을 사다 심었는데 기록적인 한파의 영향으로 모종을 심었던 밭의 양파들은 상당수가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고 유실된 반면 직파한 밭의 양파들은 대부분 살아남았다.
그래서 자유농장의 양파공동체 회원들은 다가올 겨울이 얼마나 진저리치게 추울지 알 수 없다는 판단에 전량 직파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런데 시월 중순이 지나도록 양파 싹들이 제대로 자라지를 못했다. 원래 자생한 양파 싹들은 시월 중순이 되면 젓가락만큼 자라기 마련인데 도대체 무슨 조화 속인지 시월의 마지막 밤이 지나도록 양파 싹들은 기중 큰 것들이 몽당연필만 했다. 뿐만 아니라 빈자리도 허다했다. 할 수 없이 보식을 하기 위해 모종을 사다가 빈자리를 파보니 그 속에는 미처 머리를 내밀지 못한 양파 싹들이 애처롭게 파묻혀 있었다.
헐, 하는 탄식과 함께 멍하니 하늘을 우러르는데 이제는 정말로 농사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농사를 짓다보면 해마다 날씨는 다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제는 날씨의 변화폭이 너무 커서 예측 자체가 무의미해져버렸다.
지난주에는 농장회원 한 분이 가을 가뭄이 너무 심하고 앞으로 비 예보도 없는데 배추밭에 물을 줘야하는 것 아니냐고 넌지시 의견을 물어왔다. 시월 중순을 넘겨 배추밭에 물을 대면 자칫 배추가 무를 수 있으니 가물더라도 어금니 질끈 깨물고 견디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조언을 해주는데 너무도 간절하고 안타까운 얼굴로 돌아서는 회원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그건 내 조언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앞으로 결과를 예측해서 누군가에게 조언을 한다는 게 내심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십수 년 농사를 지어왔지만 날씨는 매해 조금씩 달랐고 그때마다 음, 올해 날씨는 이렇구나 하고 대수롭잖게 넘어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황망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지난 오월 하순에 늦서리가 내려서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어이없어 해가며 고양신문에 기후변화를 걱정하는 칼럼을 쓴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폭삭 주저앉은 울금 앞에서 때 이른 서리 타령을 하고, 자라지 못하고 비실거리는 양파 싹 앞에서 날씨가 왜 이러시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다.
하늘은 농부의 땀과 노력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여전히 믿고 있지만 어쩌면 내일이 되면 하늘의 뜻이 더 이상 하늘의 뜻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마음 한켠이 무겁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