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임원경제지』
올해 수능 비중 높은 문제로 출제 
방대한 정보 담은 조선 최대 백과사전 
20년간 번역하고 연구한 보람 느껴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온 '범 내려온다' 뮤직비디오 [유튜브 영상 캡쳐]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온 '범 내려온다' 뮤직비디오 [유튜브 영상 캡쳐]

[고양신문] 누가 판소리 한 대목 ‘범 내려온다’에 관심이나 있었을까. 2020년 코로나 팬더믹이 시작할 때까지, 전 세계 통틀어 극소수였다. 이날치 밴드의 연주와 가창,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춤을 통한 현대적 재해석으로 극적인 반전이 생겼다. 이제는 최소 1억 이상이 그 노래를 안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라는 조선의 백과사전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누가 이 책에 큰 관심을 주었을까. 고양신문에서 자주 보도하기도 했지만, 역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임원경제지 (규장각본) [사진제공=임원경제연구소]
임원경제지 (규장각본) [사진제공=임원경제연구소]

그런데 최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임원경제지』가 출제된 것이다. 국어 영역의 ‘독서’ 부분에 제시된 지문(가⦁나 2개)에서다. 이 지문 아래 6문제(4~9번) 중 8번 문제는 <보기>에서 『임원경제지를 아홉 줄을 할애해 길게 해설했다.

그 문제는 “(가), (나)를 읽은 학생이 <보기>의 『임원경제지』에 대해 보인 반응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이었다. 지문의 (가)와 (나)는 각각 ‘유서(類書)의 특성과 의의’ ‘조선 후기 유서 편찬에서 서학(西學)의 수용 양상’을 다루었다.

‘유서’는 수험생에게 매우 생소한 용어다. 수능에서 처음 나왔을지도 모른다. 현대에 보통 ‘백과사전’으로 번역된다. 문제의 <보기>에서는 『임원경제지』를 “19세기까지의 조선과 중국 서적들에서 향촌 관련 부분을 발췌, 분류하고 고증한 유서”로 규정했다.

또 “향촌 사대부의 이상적인 삶을 제시”했으며, 이를 위해 “향촌 구성원 전체의 삶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집성했다고 풀었다. 그리하여 “주자학을 기반으로 실증과 실용의 자세를 견지했던 서유구의 입장, 서학 중국 원류설, 중국과 비교한 조선의 현실 등”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이 문제만 배점이 3점이었다.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높은 문제였다. 나머지 5문제는 모두 2점씩이다. 『임원경제지』가 국가공인 시험에서 이렇듯 많은 정보가 제공되면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는 처음인 듯하다.

8번 문제에서는 ‘통합적 독해 능력’을 측정하려 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17세기), 이익의 『성호사설』(18세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19세기)와 같은 유서와 『임원경제지』가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의 분석 실력을 확인하려 한 것이다.

임원경제지 (오사카본) [사진제공=임원경제연구소]
임원경제지 (오사카본) [사진제공=임원경제연구소]

『임원경제지』는 분량이 방대하고, 내용이 체계적이다. 실용성, 정보의 신뢰성 등의 특성도 보인다. ‘조선의 브리태니커’라고도 한다. 이로 볼 때 조선의 유서 학술사상 최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할 만한 고전이다.

고작 수능에 한번 출제되었다 해서 뭐 그리 호들갑까지 떠느냐고 반문할 이들도 있으리라. 하지만 20년간 『임원경제지』를 번역하고 연구해온 나에게는 그럴 만하다. 수능 8번은 요샛말로 ‘대박사건’이다. 2002년 대학원생이던 시절, 『임원경제지』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한자로 250만 자가 훌쩍 넘는다. 번역된 적도 없었다.

그러니 그 전체를 읽어본 이는 1도 없다. 이 한문 암호서를 꼭 해독해보고 싶었다. DYB최선어학원 송오현 대표에게 번역 사업 후원을 요청했다. 송 대표는 주저 없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임원경제지』 번역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 후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지금까지 96%를 완역했고, 그중 50%를 출판했다.

임원경제연구소 번역자들(왼쪽부터 민철기, 전종욱, 정명현, 정정기) [사진제공=임원경제연구소]
임원경제연구소 번역자들(왼쪽부터 민철기, 전종욱, 정명현, 정정기) [사진제공=임원경제연구소]

이 기간에 『임원경제지』와 관련된 연구와 출판물도 사뭇 증가했다. 임원경제연구소의 번역서를 비중 있게 반영한 학위논문도 적지 않게 나왔다. 그중 고양시민도 두 분이나 된다. 지금 현실에 응용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 책에서 제시한 수많은 음식 레시피를 재현하기도 한다. 이번 수능에서 『임원경제지』 문제가 등장하기까지 이 같은 배경이 깔려있다.

아무도 관심 없던 ‘범 내려온다’의 재탄생은 짧은 시간 동안 전 세계인에게 큰 감명을 선사했다. 유서라는 매개로 『임원경제지』를 출연시킨 수능 8번 역시 최소한 수십만 청소년에게 동시에 읽힌, 『임원경제지』의 창조적 재해석이다. 이 점에 주목한 것이다. 『임원경제지』가 한국문화의 ‘소프트 파워’의 근원을 탄탄하게 증명할 고전이 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임원경제연구소에서 작업한 '임원경제지' 번역 출판본 [사진제공=임원경제연구소]
임원경제연구소에서 작업한 '임원경제지' 번역 출판본 [사진제공=임원경제연구소]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