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김한수 소설가
김한수 소설가

[고양신문] 십일 월 셋째 주말에 온 가족이 농장에 모여서 백오십 포기 김장을 했다. 

여동생 셋과 매제들과 어머니와 막내 이모까지 총출동하고 보니 간만에 농장에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배추농사가 잘 되어서 가족들 모두가 배추가 너무 좋다고 돌아가면서 칭찬을 해주니 가으내 농사지은 보람에 어깨가 절로 으쓱해지면서 가족들을 불러 모은 체면이 섰다. 

어디 배추뿐이랴, 김장무와 쪽파와 생강과 양파와 마늘까지 손수 농사지은 재료들을 척척 꺼내서 쌓아놓으니 큰 잔칫상을 제대로 차려놓은 것처럼 보람이 컸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은 중요한 김장재료 가운데 하나인 갓이 내 밭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월 초에 두 평 넘게 갓 농사를 짓긴 했지만 무슨 조화속인지 갓은 시월에 접어들어서도 도통 싹을 내밀지 않았다. 

수확중인 배추들
수확중인 배추들

그러던 어느 날 자유농장의 마스코트인 노란고양이 치즈가 갓 밭을 마구 파헤치다가 내 눈에 딱 걸렸다. 오호라 바로 네 놈 짓이었구나, 잔뜩 골이 난 나는 벼락고함을 치면서 유유자적 흙을 파헤치고 있는 치즈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순식간에 후다닥 사정거리를 벗어난 치즈는 씩씩거리고 서있는 나를 도대체 왜 그러는데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여유롭게 발등을 혀로 핥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얄밉던지 그동안 녀석을 돌봐준 게 후회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녀석을 호되게 쥐어박을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훈계를 잔뜩 늘어놓은 뒤 갓 밭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두 평이 넘는 갓 밭을 자세히 살피니 그동안 녀석이 얼마나 열심히 땅을 파헤쳤을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뿐만 아니라 이웃한 무 밭에도 듬성듬성 빈 곳이 많은데 그곳도 파헤쳐져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치즈는 밭을 일구기만 하면 그곳이 자신의 전용화장실이라는 듯 파헤치고 다녔다. 흙을 고르고 양파를 심으면 열심히 파헤쳐서 양파모종을 뿌리째 뽑아놓았고, 마늘을 심어놓고 며칠 뒤에 가서 보면 곳곳에 씨마늘이 굴러다녔다. 더욱 괘씸한 것은 녀석은 내가 밭에서 일을 할 때면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 납작 엎드려서 뭐 하고 계셔 하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바로 그 자리를 파헤친다는 사실이다. 이런 고얀 놈이 있나,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서면 녀석은 저만치 도망가서 그 자리를 벅벅 파헤쳤다. 정말로 화가 난 내가 성난 기세로 달려가면 녀석은 그제야 밭 바깥으로 유유히 달아났다. 

고양이가 파헤치던 마늘과 양파밭.  낙엽과 비닐에 덮여 더는 파헤칠 수가 없다. 내년부터는 씨앗을 뿌린 밭에 그물망을 덮을 요량이다.
고양이가 파헤치던 마늘과 양파밭.  낙엽과 비닐에 덮여 더는 파헤칠 수가 없다. 내년부터는 씨앗을 뿌린 밭에 그물망을 덮을 요량이다.

그런데 정말로 기가 찰 노릇은 녀석은 내가 일을 마치고 야외테이블에 앉아서 쉬고 있으면 슬그머니 발밑으로 다가와서 한껏 애교를 부려가며 밥을 달라고 야옹거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미처 화가 풀리지 않은 나는 밥을 줄까말까 한참 고민을 하게 된다. 그래도 밥을 굶길 수는 없는 노릇, 나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녀석의 밥그릇에 밥을 채워준다. 그러면 녀석은 맛있게 식사를 마친 뒤 담배를 태우고 있는 내 곁을 당당히 지나쳐서 밭으로 들어가 여봐란 듯이 두둑을 파헤쳐서 볼 일을 본 뒤 흙을 덮는다. 그리곤 나를 돌아보며 아이 시원하다 하는 표정으로 씩 웃는다. 

애교를 떠는 고양이 치즈
애교를 떠는 고양이 치즈
농사가 끝나서 텅 비어 쓸쓸해진 농장전경
농사가 끝나서 텅 비어 쓸쓸해진 농장전경

이쯤 되면 내가 백기를 드는 수밖에 없다. 마음만 먹으면 녀석을 쫓아내는 것쯤 간단하겠지만 어엿한 농장의 일원인 녀석에게 그럴 수도 없는 노릇, 결국 내가 녀석과 함께 사이좋게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게 최선일 수밖에 없다. 물론 녀석이 나를 배려해주면 좋겠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배려는 강자의 몫일 수밖에 없고 그게 사람 사는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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