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갤러리박영 안수연 대표
박영사 70주년, 갤러리박영 15주년
3대에 걸쳐 이어진 책과 미술 사랑
지속적인 청년작가 발굴·지원 ‘보람’
[고양신문] 도서출판 박영사 70주년을 맞아 갤러리박영(대표 안수연)이 여는 특별전에서는 창업자 벽송(璧松) 안원옥 회장(1924~1992)의 고미술품 컬렉션이 사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박영사는 1952년 한국전쟁 중에 안원옥 회장이 ‘대중문화사’라는 이름으로 창업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넓게 인재를 양성한다’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박영(博英)’사로 바꿨다. 현재는 정치 경제 법률 서적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출판하고 있다.
창업자 안 회장은 평생을 책 만드는 일에 헌신했던 1세대 출판인이다. 장학사업과 학술지원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그 유지를 이어받은 안종만 회장은 우수한 학생과 교육자 및 학술 단체를 지원할 목적으로 1993년 ‘박영장학문화재단’을 설립했다.
2008년 파주출판단지에 개관한 갤러리박영은 박영사 기업 정신의 결정체라 할 만하다. 선대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미술인들이 창작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공간과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갤러리박영을 이끌고 있는 안수연 대표를 만났다.
❚본인 소개를 해주세요.
대학 불어과에 입학해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갔는데 한국이라는 나라를 잘 모르더라고요. 88 올림픽을 치른 이후였는데도 말이에요. 귀국 후 우리 문화를 해외에 알릴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갤러리박영을 시작할 때 상황은 어땠나요.
초창기에는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았어요. 출판도시에서 미술 사업을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거죠. 저희는 단순히 갤러리만 만든 것이 아니라 작업공간도 함께 제공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출발했는데요. 5명의 작가들에게 각각의 방을 무상으로 지원해주는 선도적인 사업이었어요.
❚갤러리를 맡게 된 이유는.
잡지사 기자와 디렉터 일을 하다가 결혼과 동시에 미국에 갔다 돌아와보니 부친이 출판도시에 ‘이채쇼핑몰’을 설립한 후 고전을 하고 있었어요. 저라도 힘이 돼야겠다고 생각해 2008년 예술하는 3대 가족이 됐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저, 세 명의 문화사랑 DNA가 같은가 봐요.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어려움이 많았겠군요.
잡지사 기자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미술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어요. 아버지는 ‘출판도시는 책의 마을이지만 문화가 함께 가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어요. 박영사 저자들은 법률이나 행정 쪽 어르신들이 많아서 출판사는 서울에 그대로 두고, 이곳은 숙원 사업인 미술인들의 스튜디오 공간으로 만들기로 한 거죠. 맨 처음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할 때 회장님은 “작가들에게 작업실만 지원할 게 아니라 인큐베이팅 사업을 해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주문하시더군요. 알고 봤더니 그런 일들은 국가에서 하는 일이더라고요. 상업적인 공간과 비상업적인 공간이 한 건물 안에 공존하는 예가 없었어요.
❚우여곡절이 있었다면.
미대 교수님 한 분이 “미술 사업은 시간과 세월이 흘러야 된다”라고 조언을 해주셨어요. 그 말을 듣고 모든 일은 때가 있으니 기다리자는 생각을 했어요. 서울에서 하는 모든 미술제 행사에 참가하며, 저희 레지던스 작가들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아이들을 위한 무상 프로그램을 작가들과 함께 진행했죠. 그런데 수입이 없다 보니 출판사 직원들에게 미안했고 갈등의 시간이 있었지요. 그렇게 5년이 지난 후 회장님이 “박영사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레지던스를 더 이상 하기 힘들다”고 하셨죠. 사십대를 모두 바친 저로선 혼란스럽고 원망스러웠지만, 결국 파주출판단지 1호 갤러리는 내가 굳건하게 지켜야겠다고 결심했죠. 건물 일부를 임대 주고 발생하는 고정 수입으로 이곳을 계속 운영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리고 ‘박영 신진작가 공모전’을 시작해 올해로 8년째를 맞았습니다. 그동안 레시던시 프로젝트, 신진작가공모전, 박영작가공모전 등을 통해 지원한 작가가 100명이 넘어요.
❚보람이 있다면.
언젠가 양만기 화가가 찾아오셨어요. 덕성여대 교수로 후배 양성과 국가 사업을 많이 했던 분인데요. “갤러리박영이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출판도시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말했어요. 그 전까지는 작가들이 모두 남쪽에 있는 양평, 가평, 이천 등에서 작업실을 찾았는데, 박영레지던스가 설립된 이후부터는 북쪽도 괜찮다며 후배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한 거지요. 파주출판도시에 화가들이 최대 350명 정도 모였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미술인 특구가 형성된 겁니다.
저는 초기 공모전에 지원하신 분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요. 작년에는 서울시에서 공모한 ‘서울로 미디어캔버스’에 저희가 선정이 됐어요. 서울역사 뒤 대형 전광판에 저희가 추천한 작가들 20명의 작품을 3개월 동안 전시해 무척 의미있고 뿌듯했어요.
사람들은 여전히 출판도시에 이렇게 좋은 갤러리가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고 해요. 제가 더 열심히 뛰어야 하는 이유이지요. 2011년에는 갤러리박영이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갤러리’로 CNN에 선정됐어요. 그 사실을 최근에 고3 딸이 저에게 알려줬어요. 굉장히 자랑스럽더라고요.
❚박영사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할아버지 안원옥 회장은 전주 사범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국어 교사를 하셨어요. 부산 피난 시절 전쟁통에 출판사를 설립했지요. 아버지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할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대요. “네가 얼마나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는 줄 아느냐, 우리나라는 지금 말이 있고 글이 있고 책이 있다. 읽고 쓸 수 있는 자유를 고맙게 생각해야 된다”고요.
일제강점기에 언어에 대한 핍박을 받았던 아픔이 컸기 때문에 출판사를 차려야겠다고 생각을 하신 것 같아요. 나라가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책을 내야되겠다는 거죠. 할아버지의 유언은 “박영장학문화재단을 설립해서 장학금을 지급해라, 모교인 김제 죽산 초등학교에는 책을 기증해라”였는데, 아버지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번 전시 ‘두레문화, 박영70’을 기획하게 된 배경은.
선대 회장님이 수집한 고미술품을 정리하고 지키자는 의미로 아카이빙 작업을 했어요. 그 작품들 중 일부를 할아버지의 호 ‘벽송’을 따서 사후 30년 만에 ‘벽송 컬렉션’으로 오픈했습니다. 마침 사진 작업을 함께 하게 된 사진가가 간송의 고미술품을 촬영한 작가였는데요. 간송과 할아버지가 일본에 있는 우리 미술품의 환수에 대해 긴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해주더군요. 그 말을 들으니 할아버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60~70년대에 『우리나라의 옛 그림』 『동양미술사』 『서양미술사』등 미술 관련 책 3권을 펴낼 만큼 애정이 남달랐어요. 이번 전시는 문화 사랑이 박영사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마련했습니다. 한국화의 뿌리를 이룬 청전 이상범, 의제 허백련, 심전 안중식, 운보 김기창 등 대가의 걸작부터 서예 소장품까지 한국미술사의 단면을 보여 드릴 겁니다.
❚전시 준비 과정은 어땠나요.
박영사 70주년은 두레 정신으로 압축된다는 의미로 전시 제목을 ‘두레문화’로 정했어요.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은 “우리나라 미술 발전을 위해서 선대 회장님이 하신 일을 크게 알려야 된다”고 추천사도 써주셨어요.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을 촬영하고 있는 이동춘 사진가와 함께 준비를 했어요. 이 작가는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잡지의 창간 멤버로 우리의 한옥, 사찰, 종가와 제례 문화를 수십 년 동안 촬영했어요. 지금도 경북 안동에 머물면서 종가문화가 깃든 가옥을 촬영하고 있는데요. 이번에 전시 포스터를 제작하고, 박영사가 출판한 고서들 사진 작품을 전시했어요. 공간이 협소해서 더 많은 작품들을 보여드리지 못해 아쉬워요.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최근에 ‘박영문화사’라는 문화예술 전문 출판사를 만들었어요. 그동안 제가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도 조만간 출간할 계획입니다. 박영사는 문화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고요. ‘넓게 인재를 양성한다’는 박영사의 정신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