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역전시관 기증전에서 만난 두 시민
오랜 세월동안 모아둔 기차표·우표·지도
가족과 함께한 기차여행 영상 ‘흥미진진’
[고양신문] 고양시가 100만이 넘는 거대도시로 성장하기 전, 고양과 외지를 연결해주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는 경의선 철길이었다. 특히 능곡역과 백마역, 일산역 등 오랜 역사를 지닌 역들은 수많은 이들의 삶의 기억이 배어있는 장소다.
기차역과 관련한 시민들의 정겨운 추억을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열렸었다. 31일까지 고양 일산역 전시관에서 진행한 제2회 특별기증전 ‘역, 추억을 담다’에서는 시민들이 소장하고 있던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됐다. 전동관 열쇠, 열차 브레이크, 90년대 역무원 모자 등을 비롯하여 통일호 승차권, 1996년도에 촬영된 일산역과 문산행 열차 내부 영상, 2000년대 초반의 일산역 사진 등 이제는 볼 수 없는 철도문화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전시물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보니, 사연 가득한 물건과 자료들을 기증한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 중 연도별로 꼼꼼히 모아온 통일호 승차권과 기차 관련 우표를 여러 장 제공한 편명섭씨,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일산역에서 문산역까지 기차여행을 다녀온 모습을 홈비디오로 촬영한 영상을 제공한 유영훈씨를 일산역전시관에서 만나보았다.
“다채로운 분야 수집품 이웃과 나누고파”
- 고양시 으뜸 일상수집가 편명섭씨
편명섭씨는 대장동에서 나고 자라며 학교를 모두 능곡으로 다닌 토박이다. 1975년에 능곡우체국 집배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해 이후 학교 시설관리주사로 일하며 도합 40년이 넘는 공직생활을 마쳤다. 편씨의 취미는 일상의 모든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기증전에 제공한 기차표는 물론 지금은 사라진 토큰, 회수권, 기념주화, 국가별 화폐 등을 꼼꼼하게 모았습니다. 직장생활을 우체국에서 시작한 덕분에 각종 기념우표를 비롯해 고양군 시절 지도 등 우편 관련 수집품도 엄청 많구요.”
편씨는 몇 해 전부터 자신이 수집한 물건들을 하나 둘 시민들에게 선보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고양시승격 30주년을 기념해 진행한 ‘시민기증전’에도 다양한 수집품을 제공했고, 구 능곡역사를 리모델링해 ‘토당문화플랫폼’으로 꾸미는 과정에서도 편명섭씨가 제공한 자료와 사진들이 중요한 콘텐츠가 됐다. 덕분에 고양시 소식지와 능곡 도시재생자료집, 『고양시승격 30년 이야기』 등 여러 매체와 책자에 편명섭씨의 남다른 수집 스토리가 소개됐고, 시민기록가상 고양시장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편명섭씨는 기차역과 관련한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
“증기기관차가 달리던 시절, 부모님이 밭에서 직접 기른 농산물을 이고 지고 열차에 올라 서울까지 가서 팔고는 하셨어요. 돌아올 때는 빵을 몇 개 사들고 오셨구요. 서울로 통근하는 학생들도 많았는데, 일산과 금촌, 문산 학생들이 패거리를 지어 기싸움을 하기도 했구요, 입대 영장을 받고 훈련소로 떠나는 젊은이들을 환송하는 곳도 기차역 플랫폼이었습니다. 기차가 디젤기관차로 바뀐 80년대에는 백마역 인근에 주점과 카페촌이 들어서면서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기찻길 옆 논길을 따라 줄지어 걷는 풍경이 펼쳐지기도 했구요.”
자신이 수집한 소소한 물건들이 다른 이들에게 옛 시절의 추억을 호출해주는 매개체가 되고 있어서 무척 행복하다는 편명섭씨는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 관련된 수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요청이 오면 언제든 제공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일상도 추억이 됩니다”
- 홈비디오로 가족 영상 기록한 유영훈씨
유영훈씨는 1995년 후곡마을 아파트를 분양받아 일산신도시 1기 주민으로 입주했었고, 지금은 파주에 살고 있다. 유씨가 이번 기증전에 물건이 아닌 영상 콘텐츠를 제공했는데, 내용이 무척이나 재미있다. 1997년 가을의 어느 휴일 오후에 유영훈씨와 아내 이순정씨,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과 1학년인 두 자녀(미나·성근)와 함께 짧은 기차여행을 다녀오는 행복한 순간들이 홈비디오 영상 속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영상은 아파트 현관을 나서면서부터 시작해 횡단보도와 철길 육교를 건너 옛 일산역사 건물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자연스레 입주 초기 아파트단지의 풍경과 규모는 작지만 정겨웠던 구 일산역사의 내부가 고스란히 영상에 담겼다.
문산행 통일호 열차에 오른 아이들은 신이 난 표정으로 기차 내부 곳곳을 돌아다닌다. 앞 뒤 의자가 마주보도록 설계된 좌석에서 가족들이 수다를 떨기도 하고, 칸과 칸을 이어주는 연결통로에서 문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비록 문산역 플랫폼에 도착했다가 곧바로 다시 돌아오는 짧은 여정이었지만, 이날의 기차여행은 가족들에게는 행복했던 한 시절을 추억하고 시민들에게는 지금은 사라진 26년 전의 모습들을 생생히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
유영훈씨 역시 어릴적부터 기차가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방학 때면 고향인 청주에서 서울역으로 올라와 신촌역 부근에 사는 외삼촌댁에 갔다가, 교외선 열차를 타고 의정부에 사시는 작은아버지 댁에도 가곤 했어요. 능곡을 지나 벽제, 일영, 송추를 거쳐가는데 증기기관차 기적소리를 들으며 바라보는 차창 밖 풍경이 참 아름다웠지요.”
손재주 좋고 호기심이 많았던 유씨는 직장생활을 하며 카메라와 캠코더를 마련해 사진과 영상을 찍고 편집하기를 즐겼다.
“지금은 모든 게 디지털화됐지만, 예전에는 사진도 직접 꾸민 암실에서 인화해야 했고, 영상도 비디오데크 두 대와 오디오 믹서기 등을 연결해 하나하나 편집을 하곤 했지요. 그러다보니 테이프 수백개를 집안에 쌓아놓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디지털 파일로 변환시켜 저장해놓았습니다.”
유씨는 저장해놓은 영상 일부를 유튜브채널 ‘SaneGAJA’(산에가자)에 업로드하고 있다. 이번에 공모전에 제공한 가족 기차여행 영상도 ‘일산→문산→일산행 기차여행’이라는 제목으로 검색하면 누구나 볼 수 있다.
인터뷰 자리에는 영상에서 여덟 살 개구쟁이로 등장한 아들 성근씨가 동행했는데, 지금은 든든하게 아버지를 챙기는 어엿한 직장인으로 성장했다.
수많은 영상을 찍고 편집해온 유영훈씨는 조만간 심혈을 기울인 역작을 작업할 궁리를 하고 있다.
“아이들 둘이 아직 미혼인데, 아이들의 성장 모습을 담은 영상들을 편집해서 사위와 며느리에게 줄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와, 우리 장인어른, 시아버지 멋지십니다’ 하겠죠?”(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