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원석 칼럼 [내일은 방학]
[고양신문] 지울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한 채 새해가 밝았습니다. 서로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말이 호랑이 등을 타고 내려와 토끼의 귓가에 맴돕니다. ‘공감’이 이전에 유행했던 ‘힐링’을 대체하고 끊임없이 우리 곁에 머무는 이유입니다. 같은 경험을 하는 것만큼 가장 좋은 공감의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늘 상황적 공감 상태를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의 모든 경험을 직접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간접경험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읽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 즉 인문학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공감하며 살기 위한 최소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황을 상상하며 공감할 때, 우리는 보통 들어주기, 물어보기를 통해 접근합니다.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대한 상대의 입장이 되어주기 위해서는 세심한 경청과 소통이 그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때로는 단순한 경청과 소통이 상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는 것을 그 일을 겪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2012년 2월 고양시 모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신입생 학부모인데, 교복을 입을 수 없어도 학교에 다닐 수가 있나요?”
잠시 당황했지만, 아마도 경제적인 문제려니 생각하고 방법을 찾을 수 있으니 일단 학교로 방문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아이가 좀 특별해요~ 아토피가 심해서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닐 수가 없어요”라는 수화기 너머 이야기를 듣고 바로 우리 학교는 혁신학교이고 다양성에 기반한 철학을 가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학교를 일단 방문해달라는 이야기를 재차 반복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인가요?”라는 재차 질문에 새 학기 준비로 분주한 상황이었지만 ‘소통과 공감의 공동체’라는 교육 비전을 마음에 새기며 “어머니, 걱정하지 마시고 학교에 방문해주세요. 우리 학교는 일반 학교와 다릅니다”라는 말로 학교 방문 날짜를 잡았습니다.
다음 날, 학생과 학부모가 약속된 시간에 교무실로 찾아오셔서 함께 교장실로 내려갔습니다. 학생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목 주위 상처에서는 계속 진물이 내려오고 있었고 낮아진 자존감에 얼굴을 한 번도 들지 못했습니다. 서로 한참 떨어져 앉아 있는 부모님들을 보면서 그동안의 가정 내 갈등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의 기본 철학과 교육과정을 구체적으로 소개해드리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20여 분간의 학교 소개가 끝난 후 어머니의 말씀은 충격이었습니다.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러면 아이는 학교에 다니기만 하겠네요. 그 많은 시선을 느끼며…” 잠시 후 아버지는 “일어나, 가자…”라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교장 선생님께서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 저희가 두 분을 학교에 방문하시라고 한건… 교복 때문도, 학교 교육과정 안내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아이의 밥은요? 아이의 밥에 대해 논의하려고 오시라고 했습니다. 방문하시기 전에 학교 영양사님과 아이를 위해 밥과 반찬을 따로 어떻게 준비할지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정확한 아이의 정보가 필요해서 오시라고 했습니다.”
다시 자리에 앉아 머리를 감싸고 우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아이의 정보를 하나씩 이야기해 주시는 어머니의 떨리는 입술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날 아이는 생태 텃밭 동아리를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고 학부모님들은 서로 두 손을 꼭 잡고 교장실 문을 나갔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하였을까요?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첫 통화도, 다양성과 공동체가 녹아 있는 학교의 교육과정도 그들의 마음을 열지 못했습니다. “아이의 밥은요?”라는 ‘알고 물어보는’ 말 걸기가 진정한 공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저는 수많은 단순한 경청과 소통이 누구에게는 반복되는 상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마음을 다해 말 걸어 봅니다.
새해! 공감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