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작가
이인숙 작가

[고양신문] 일제의 강압통치가 삼엄하던 1923년 1월 12일 저녁 종로경찰서에 날아든 폭탄, 김상옥의 의열투쟁으로 경성 천지가 들끓었다. 총독부는 닷새 후 후암동의 허름한 민가를 에워쌌다. 경찰이 문고리를 잡아채자 총격전이 벌어졌고, 3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지만 김상옥은 남산으로 도망쳤다. 날이 밝자마자 1000여명의 경찰이 남산을 에워쌌으나 끝내 추적은 무산됐다. 며칠 후 경찰은 김상옥의 새 은신처를 알아냈고 세 시간에 걸친 총격전 끝에 김상옥은 처참하게 살해됐다. 자결할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 않겠다던 자신의 말을 지킨 것이다. 동대문 인근에 번듯한 가게를 가진 자영업자로서 자녀도 있었으나 3.1운동을 계기로 혁명가의 길을 걸었던 감상옥은 그렇게 장렬하게 전사했다. 

  비밀결사 ‘철혈광복단’ 단원들이 조선은행의 현금수송마차를 습격하여 15만원을 탈취한 사건은 어떤가. 이 돈은 “북로군정서 규모의 독립군부대를 아홉 개나 더 편성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1920년 1월 현금수송계획을 알아낸 4인의 광복단원들은 거사에 성공한 후 블라디보스토크 바닷가 조선인 거주지 신한촌에 숨어들었다. 그들은 15만원의 군자금을 무기구매와 무관학교 건립에 사용하기로 하고 무기구매 중개인으로 엄인섭을 내세웠다. 엄인섭은 안중근과 함께 의병부대를 지휘했던 연해주 독립투쟁의 주요인물이었다. 무기구매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네 사람은 대규모 무기 인수를 앞두고 들뜬 마음에 술을 마시다가 잠들었다. 

  그날 새벽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잠을 자던 네 사람은 속수무책이었다. 발이 빠른 최봉설은 헌병들을 물리치고 이웃집 판자 담장을 여럿 뛰어넘어 바다로 내달렸다. 총 맞은 팔에 내복바람으로 얼어붙은 아무르만을 내달린 그는 온몸이 동상에 걸렸지만 다행히 적절한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 헌병대는 빼앗겼던 돈 가운데 13만원을 회수했다. 독립군부대를 만들고 무관학교를 세우고자 했던 광복단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체포된 세 사람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모진 고문 끝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현금수송 정보를 알려준 은행원 전홍섭은 무기징역이었다. 

  새벽의 기습은 밀정의 제보 덕분이었다. 놀랍게도 밀정은 무기구매를 맡겼던 엄인섭이었다. 그는 안중근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암살과 친일파 처단의 맹세로 손가락 마디를 절단한 결의형제 사이였다. 이런 사람을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는단 말인가. 그가 밀정이라는 사실은 처형당한 세 사람도 살아난 최봉설도 몰랐다. 젊은 후배들을 일제의 모진 악형에 던져놓고 끝내 처형당하게 만든 장본인은 별 탈 없이 살다가 52세에 병사했다. 과연 역사에 정의는 있는가. 그가 밀정이었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밝혀졌다. 그의 행각을 낱낱이 기록한 일본 총영사관 문서가 알려졌기 때문이다. 

  임경석 교수의 『독립운동 열전』에는 이처럼 이름 없는 이들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투쟁, 가족의 피눈물이 책장마다 배어있다. 유명한 애국지사가 아니라 이름 없는 이들의 조국을 위한 무한한 희생을 따라가다 보면 저자가 서두에서 밝힌 ‘무명의 헌신에 대한 경의’라는 말이 거듭 가슴을 울린다. 반면에 자신의 안위와 재물을 위해 목숨 걸고 함께 투쟁하던 동료들을 사지로 내몬 엄인섭 같은 배신자의 악행은 분노를 넘어 인간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한다. 

  80년대에 노동운동을 하다가 동료들을 밀고한 대가로 경찰에 특채돼 승승장구했다고 의심받는 사람이 신설된 경찰국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이 활동하던 선배는 잡혀가 고문의 후유증을 겪다가 사망했다. 경찰의 ‘끄나풀’이었다는 혐의가 사실이라면 그는 엄인섭 못지않은 사악한 인간이다. 게다가 그는 최근에 더욱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 식민지 시절도 아닌데 동료 선후배를 배신하고 사지로 내몬 사람이 출세하는 세상이라면 그것은 한참 잘못된 세상이 아닌가. 


  조선은 스스로 망했으며 일본은 조선과 전쟁을 한 적이 없다는 정치인의 발언도 있었다. 19세기말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던 동학농민전쟁, 국권침탈기에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전쟁은 전쟁이 아닌가. 정부와 정부의 싸움만이 전쟁은 아니다. 『독립운동 열전』이 말해주듯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한국인의 독립전쟁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정의는 하늘에서 내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만들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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