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닥터 조수현 칼럼
[고양신문] “치킨은 살 안 쪄요. 살은 내가 쪄요.”
제가 출퇴근 시간 이용하는 지하철역에서 본 광고 문구입니다. 이 광고는 배달의민족 치킨 광고 분야에서 영예의 대상을 탄 수상작으로 수상자에게는 치킨 365마리가 주어졌다고 합니다.
사실 치킨은 내가 살이 찌는데 아무 잘못이 없죠.(살이 찌는 게 잘못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허전한 마음에, 기분이 울적해서, 축구를 봐야 하니까 치킨집 전화번호를 누르는 내가 문제인 거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돈에 대해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교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돈에 대한 것은 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유교에서는 사회의 주요 구성요소를 관리, 농민, 공장, 상인 등 사민(四民)으로 구분하였는데 돈을 다루는 상인을 가장 뒤에 둔 것을 보면 돈에 대한 가치를 매우 낮게 여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는 돈을 제외하고는 설명하기도, 살아가기도 불가능한 세상입니다. 세상 모든 것에는 가격이 매겨집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람 목숨에도 가격이 있습니다. 세계인권선언문에서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고 선언하지만 돈은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망보험금은 사람에 따라 다르며, 테러나 사고로 죽은 희생자에 대한 보상금도 다릅니다.
돈처럼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도 절망에 빠뜨리는 것도 없습니다. 돈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하고, 원수도 손을 잡게 하고, 사막에서도 스키를 탈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맘에 드는 옷을 가격표 때문에 내려놓게 되고, 가고 싶은 여행지를 경비 때문에 바꿔야 합니다. 하고 싶은 취미나 장래 희망을 선택할 때에도 돈은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혹자는 돈 때문에 서로 싸우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며 돈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인생은 돈보다 더 순수하고 보람되고 가치있는 일에 쓰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소설가 애밀 졸라는 그의 저서 『돈』에서 “돈으로 생긴 모든 부정의 책임을 왜 돈이 전부 떠맡아야 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개개인의 성향과 철학적 견해가 다르듯 돈에 대한 객관적 판단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돈에 대한 욕구는 경제적 진보의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 위험, 심지어 인생을 거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를 개척했고,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으며, 미국 초기 이주민들은 황금을 향해 서부를 개척했습니다.
돈은 경제적 자유를 얻게 해줍니다. 경제적 자유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따라서 경제적 자유를 누리기 위한 부의 크기는 개개인의 성향과 책임져야 할 의무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경제적 자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에 너무 집착하여 그것을 모으는 데만 집착한다면 그 또한 노예의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낭비벽이 심한 사람도 새로 돈을 마련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경제적 자유는 부의 크기뿐만 아니라 건전한 태도도 함께 갖춰져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유럽증권계의 위대한 유산 앙드레 코스톨리니는 돈은 그것을 열정적으로 갈망하는 사람에게 향하지만 돈의 조정을 받아 최면에 걸릴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돈에 대한 열정과 적절한 거리 유지를 강조하였습니다.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
저는 저 자신뿐만 아니라 제 아이들도 앞으로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서 로버트 기요사키는 자신의 두 아버지의 가르침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가난한 아빠는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라고 하신 반면 다른 아버지는 “돈이 부족하다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돈은 잘못이 없습니다.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