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김한수 소설가  
김한수 소설가  

[고양신문] 한 겨울, 농장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지만 나는 고양이 밥을 챙기기 위해 사나흘에 한 번 꼴로 농장에 간다. 그러면 토실토실 살이 오른 고양이 치즈가 어디선가 후다닥 튀어나와 내 다리에 몸을 부비며 야옹거린다. 두툼한 눈 이불을 덮고 깊은 겨울잠에 빠진 농장을 잘 지키고 있는 녀석이 기특하다.

나는 녀석의 빈 밥그릇에 사료를 가득 부어준 뒤 하우스 안 전기난로 옆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신다. 올 겨울 농장풍경은 그 어느 때보다 춥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예년 같으면 영하 십도를 넘나드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곁에서 일주일이 멀다하고 왁자지껄 술판을 벌이곤 했는데 작년 가을 이후로는 농장에서 신명나게 판을 벌이는 일이 사뭇 조심스러워졌다. 

함박눈에 덮인 농장풍경
함박눈에 덮인 농장풍경

자유농장 앞에는 큼직한 이층짜리 벽돌집이 있는데 나는 그곳에 사는 가족들과 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자주는 아니지만 더러 술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고 특별한 음식을 하면 접시가 오고갔다. 형제애가 돈독한 그 집은 주말이면 늘 북적북적했고, 평일에도 마당에 환히 불을 밝히고 숯불에 고기를 구워가며 이야기꽃을 피울 때가 많았다. 

그런데 작년 시월 말, 양파공동체 회원들과 함께 양파를 심고 있는데 느닷없이 그 집에서 곡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가 넘겨다보는데 마당에는 차가 꽉 들어찼고 애끓는 곡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 집의 이십대 아들이 이태원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접한 건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나는 이태원참사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참혹한 비극이 바로 내 눈앞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좀체 믿기지 않았다. 

그 이후로 농장에 가면 모든 게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는 사이 책임지는 사람이나 처벌받는 사람 한 명도 없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해가 바뀌었다. 이러다가 세월호처럼 진실을 밝히기 위한 목소리들이 어둠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함박눈에 덮인 농장풍경
함박눈에 덮인 농장풍경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몇 년 뒤 나는 단원고 유족들이 모인 간담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유족들에게서 세월호 참사가 진상규명도 없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라고, 여기 당신들의 곁에서 끝까지 함께 할 사람들이 있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고양과 파주의 시민들과 함께 두 해에 걸쳐서 단원고 유족들에게 김장김치를 담가 전달한 적이 있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이제 겨우 삼 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를 처벌하자는 목소리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황석영의 단편소설 「아우를 위하여」에는 여럿의 무관심으로 정의가 무너지는 일은 없어야 하며 저 창밖에서 누군가 얼어 죽는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어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비극은 우리의 무관심을 먹고 자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세월호를 기억하고, 이태원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모든 게 명명백백해질 때까지 집요하게 사회적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극은 계속해서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다가오는 주말에는 광장에서 촛불 하나 밝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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