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정 기자의 공감공간] 오래된 학교 앞 문방구 탐방기
저마다의 소소한 이야기 간직하며
한자리 지켜내는 성실한 사장님들
잊고 지냈던 어릴적 추억 새록새록
[고양신문]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잠깐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정겨운 장소들이 하나둘 사라져버렸다. 구멍가게, 동네슈퍼, 이발소, 다방, 구둣방, 문방구, 비디오대여점 등. 생계를 위한 장소이면서 일상을 함께하고 정을 나누던 곳들이 이제는 동네에서 보기 힘들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래된 동네, 추억의 공간에 눈길이 가고 그곳에 가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고 여유가 생긴다.
사람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가 각자 다르듯이 공간도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 이야기에 관심이 생겼다. 특히 많은 이들의 어릴 적 추억의 공간인 문방구가 생각났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하굣길에 친구와 거의 매일 문방구에 들렀다. 못 보던 새로운 학용품이나 예쁜 종이인형이 나왔는지 구경하는 맛이 쏠쏠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방구 이야기를 수집하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
문방구 앞 뽑기통 도난사건
화중초 앞 ‘이화문구프라자’
화중초등학교 앞 ‘이화문구프라자’는 단독주택과 오래된 상가건물이 있는 길가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어 눈에 잘 띈다. 여느 문방구보다 실내가 넓고 진열대 위 문구류들이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정갈해보인다. 짧은 커트 머리의 인상 좋은 문방구 주인은 2000년 1월 1일에 영업을 시작해 처음엔 남동생과 같이 일을 하다 몇 년 전부터는 혼자 문방구를 지킨다. 아이들 수도 많이 줄고 학교에서 학습준비물을 거의 다 준비해주니 매출이 많이 줄어 힘들어서 그만둘까 하다가도 그냥저냥 계속 문을 열고 있다고 한다.
취재 중에 아이들 몇 명이 안으로 들어와 먹을거리 몇 가지를 골랐다. 아이들의 구매 1순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일명 ‘불량식품(실제 불량식품은 아니다)’인 듯하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질문에 주인장은 ‘뽑기 통’ 이야기를 꺼냈다.
“몇년 전, 평소대로 계산대 앞에서 아이들이 고른 물건을 계산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한 아이가 급하게 들어오더니 ‘어떤 꼬마애가 앞에 있는 뽑기 통을 들고 가요!’라고 소리치더군요. 깜짝 놀라 정신없이 나가보니 벌써 보이지 않는 거예요. 혹시나 해서 골목 안으로 쫓아갔더니 초등학교 1~2학년 돼 보이는 남자애가 낑낑거리며 뽑기 통을 들고 가는 게 보였어요. 아이를 붙잡고 황당해서 뽑기 통을 왜 들고 갔냐고 물어봤죠. 너무 갖고 싶은데 뽑기 할 100원도 없어 그냥 들고 갔다는 거예요. 그 아이의 말에 가슴이 너무 아팠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꽤 오래전에 드라마 촬영지로 TV에 나온 적도 있어요. ‘신의선물-14일’ ‘하이드지킬, 나’ 촬영 이후 일본 아주머니들이 관광버스 타고 문방구에 와서 현빈이 남기고 간 사인본을 들고 기념촬영도 했었죠.”(웃음)
우리 아빠는 문방구 사장님!
백신초 건너편 ‘엽아저씨문구’
백석동 백신초등학교 건너편 상가에 있는 문방구는 이름부터 남다르다. 문방구 간판도 일러스트 이미지로 깔끔하고 산뜻해서 시선을 확 사로잡는다.
“백신초등학교 개교 때부터 시작했어요. 날짜도 정확히 기억해요. 1994년 9월 10일. 원래는 상가 이름을 따서 한진 문구라 했었는데 몇 년 전에 ‘엽아저씨문구’로 바꿨어요. 제 이름이 엽광술입니다.”
간판은 디자인 관련 일을 하는 아들이 아버지 부탁으로 디자인해 주었다고 한다.
“어떤 이야기를 담아서 간판을 만들까 고민하다가 문방구에서 20년 이상 일하시는 아버지를 다시 살펴보게 됐어요. 이제는 물건을 사러 오는 아이들보다 복사하거나 팩스 또는 메일을 보내러 오시는 어르신들이 더 많은 거 같아요. 그분들 대신 일처리를 해드리는 걸 보고 동네에서 사랑방 역할을 하시는 모습이 크게 와 닿았어요. 동네에서 물건을 파는 단순한 문방구가 아닌 다양한 역할을 하는 일에 대한 가치를 보여주고, 그런 이야기가 담긴 이름이면 좋겠다 생각했죠. 그래서 아버지 성인 ‘엽’에 ‘아저씨’를 붙이고 아버지 얼굴을 친근한 이미지로 그려 넣어 완성했어요.”
한창 잘 될 때는 문방구 옆에 있던 서점까지 인수해서 문구류와 책, 문제집까지 판매했지만 지금은 규모를 반으로 줄이고 문구류만 팔고 있다.
“그만할까 하다가도 ‘이런 동네 문방구가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는 손님의 말을 들으면 힘이 나서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은 계속 장사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 문방구의 자랑은?
모당초 인근 ‘하늘문구’
그동안 만났던 문방구 주인 대부분은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 많았다. 모당초등학교 인근 ‘하늘문구’는 40대의 ‘젊은’ 주인이 운영하는 문방구다.
“예전부터 있던 문방구를 2014년부터 제가 맡아서 하고 있어요. 근처에 모당초, 안곡초, 하늘초, 일산초 이렇게 4개의 초등학교가 있는데도 문방구가 적어 그나마 장사가 되는 것 같아요. 다양한 종류와 질 좋은 팬시상품을 가져다 놓으려 애쓰고 있죠. 유튜브를 통해 인기 있는 상품을 찾아내고 진열해놓으니 소문을 듣고 다른 지역에서도 아이들이 찾아왔어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매출이 점점 줄어들어 걱정입니다.”
주말부부라서 초등생 아들을 돌보며 일을 하는 ‘워킹대디’인 문방구 주인 추기식씨는 좁은 공간에서 아들과 오랜 시간 같이 지내는 게 쉽지 않다는 말을 했다. 그래도 함께 출근하고 퇴근하며 보낸 시간들이 나중에는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며 하루하루 열심히 지내려 한다고 덧붙였다.
정겨움 찾아 나서는 여행
시간이 지날수록 운영이 어려워 문을 닫거나, 남아 있더라도 문구류 판매만으로는 어려워 슈퍼마켓의 기능을 함께하는 문방구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문을 열고 있는 문방구를 만날 때면 내 어린 시절을 소환해주는 것 같아 보물을 찾아낸 듯 반가웠다. 한 편에선 다양한 형태의 대형 문구매장들이 늘어나 편하게 문구류를 살 수 있으니 좋다고 말하지만, 그것 이상의 사람냄새가 나고 세월을 품고 있는 문방구가 오랫동안 남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 다시, 함께. 동네문방구로의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