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모임 중독자의 고백
『내가 빵을 굽다니, 찬장 속 밀가루가 웃을 일이다』 (박채란, 도트북)
가스요금 2700원. 한 달치 요금이었다.
아침은 늘 거르고, 점심은 대충 때우고, 저녁은 외식으로 만찬을 즐기던 시절이었다. 가스 기본요금이 1700원인가 했으니, 한 달에 1000원어치 취사용 가스를 사용한 것이었다. 원래도 요리엔 취미가 없었고, 남편이 원하는 집밥 메뉴는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었으니 현명한 선택을 한 셈이었다. 장 보고 요리하는 것보다 사 먹는 게 저렴하기도 했고, 식재료가 냉장고에서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일도 줄었기에 죄책감도 덜했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가 터졌다. 그 와중에 새 집으로 이사도 했다. 배달을 시켜 먹자니 새 집에 쓰레기가 쌓이는 게 싫었을 뿐 아니라 평균 3000원의 배달료도 부담이었다. 부엌에 자주 들어가서 음식을 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청귤청을 만들고, 명이나물 장아찌를 만들고, 만두를 100개씩 빚어 대고, 햄버거스테이크를 몇십 개 만들어서 냉장고를 채웠다. 제철 생고사리를 사서 육개장을 끓이고, 원두커피를 갈아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즐겼다. 이런 내용들을 SNS에 올리니, ‘다음 생에는 당신의 아내로 태어나겠다’는 댓글까지 달렸다. 요리를 좋아하고 게다가 잘하기까지 하는 여자로 비친 모양이다.
비슷한 시기에 느닷없이 빵과 과자를 굽기 시작한 작가가 있다. 긴 겨울방학과 함께 엄마에게는 지옥이 시작되었다. 배 아파서 낳은 아이들이 방학 때 엄마 껌딱지가 되거나 방바닥과 한 몸이 되어 버리는 일은 엄마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다. 작가의 말마따나 ‘모든 인간은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 세상에 왔’고, ‘아이들 역시 행복해지기 위해 분투하는 것뿐’이다. 그럼 ‘새로운 과제’와 ‘한계’를 맞닥뜨린 돌봄노동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아이들도 기분 좋고, 엄마도 기분 좋은 것을 하려면? 박채란 작가의 베이킹은 그렇게 시작됐다.
재료를 준비하고, 계량을 하고(외국 음식, 특히 베이킹은 계량을 꼭 지켜야 한다. 한국 음식처럼 적당히, 한 꼬집, 대충, 넣는 둥 마는 둥 이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 숙성을 하고, 1시간 넘게 굽거나 찌는 수고를 감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작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과자 하나를 사 먹고 나면 포장재 쓰레기가 얼마나 나오는지 아냐고 작가는 되물었다. 직접 만들면, 몸은 고될지라도 쓰레기가 거의 나오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한 번 만들고, 한 번 먹고, 한 번 기쁘고, 끝. 그리고 새로운 베이킹으로 또다시 즐거움을 생성한다.
하지만 더 좋은 건 ‘먹는다는 게 몸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란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마들렌을 홍차에 찍어 먹으며 옛 기억을 되살린다. 프루스트가 말하길, “갑자기 모든 기억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맛은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고모가 차에 살짝 담가 내게 건네주던 바로 그 마들렌의 맛”이었단다. ‘몸은 정신보다 기억력도 복원력도 훌륭’하니, 먼 훗날 아이들이 엄마가 만들어 준 과자나 빵이 어떤 기억을 남겨 줄지 기대해 보는 것은 행복한 상상이다.
박채란 작가는 아이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바탕으로 베이킹을 했다는데, 아이가 없는 내가 요리에 몰두한 이유는? 쓰레기를 덜 만들겠다는 거창한 이유도 아니고, 남편에 대한 사랑이 새삼스럽게 샘솟았기 때문도 아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약간은 깔려 있었겠지만, 비중이 그리 높지 않다. 작가가 베이킹을 하고, 그 시간을 기록하여 책으로 남긴 것은 ‘아이들과 함께 기쁘게 빵을 만들어 먹었던 시간을 기록’하는 것과 더불어 ‘그 시간을 통과하면서 자신에게 던진 질문과 대답’을 묶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작가는 ‘진짜 궁금한 것을 묻고 최대한 진실에 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우리 너머로 데려다주는 가장 위대하고 안전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요리를 하고, 음식을 예쁘게 그릇에 담고, 사진을 찍어 SNS에 남기는 과정이 싫지만은 않다. 그 과정과 결과에 나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에. 물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세상 맛있게 먹어 주는 남편의 얼굴을 보는 것도 기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