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총을 들고 지리산과 백아산을 누비던 아버지와 어머니, 작가의 부모는 빨치산이었다. 빨갱이 부모를 둔 덕에 작가 자신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일가친척들까지 사회생활에 상당한 지장을 받았다. 지난해에 출간된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와 해방일지』 이야기다.
“아버지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소설은 ‘빨치산의 딸’인 작가가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조문객을 맞으며 그동안 몰랐던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다. 오랜 감옥 생활에도 불구하고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는 평등한 세상을 향한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일상생활에서도 이를 실천하기에 힘쓴다. 평생 엄숙하고 진지하게 살았던 아버지의 이상주의는 현실주의자인 딸에게 우스꽝스럽게 보일 때가 많다. 아버지의 ‘진지일색’의 삶과 이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딸의 시선의 어긋남이 종종 웃음을 유발한다. 무거운 내용을 전혀 무겁지 않게, 해학이 넘치는 가벼움으로 현대사의 아픈 부분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양한 조문객들이 들려주는 아버지의 모습과 그들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사건들은 지금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반목과 혐오의 뿌리를 보여준다. 신념과 신념이 부딪치면서 역사는 거대한 파열음을 내면서 찢어졌고, 그 소용돌이에 끌려들어간 개인들의 삶도 산산이 부서졌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 우리는 아직도 남북 간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같은 분단국가였던 독일이 이미 삼십여 년 전에 통일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통일은커녕 현재는 남북이 대화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다. 왜 우리는 분단 상황을 해소하지 못할까.
남과 북 사이의 적대적 관계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 사이의 분열과 반목이다. 한국사회의 분열이 심각하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리고 주원인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치를 꼽는다. 정치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서로 다른 것을 아우르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분열과 반목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남과 북은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상대방의 위협을 과장하거나 도발을 부추겼고 국민들의 공포감을 조장했다. 양쪽 모두 이른바 적대적 공생관계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던 것이다. 보수를 자처하는 세력은 북을 적으로 규정하고 걸핏하면 정치적 반대자를 좌파 빨갱이 운운하면서 색깔론으로 매도했다. 그런데 군부독재를 이겨내고 민주화가 된 지도 수십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북의 위협을 과장하면서 국민들을 분열과 반목으로 이끄는 세력이 있다. 오랫동안 광적인 반공주의에 길들여진 국민들의 일부는 이를 지지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남북관계는 냉온탕을 오간다. 시간이 갈수록 갈등과 분열이 치유되기는커녕 양측의 골은 깊어가고 상대에 대한 혐오는 심화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혐오가 남과 북의 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분단 상황을 고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아버지의 절친 박 선생은 평생 조선일보만 본다. 아버지와 대척점에 있지만 아버지는 그래도 그 친구가 사람은 제일 낫다면서 가깝게 지낸다. 형과 누나들이 모두 빨치산으로 산에서 죽은 가족사를 가진 박 선생이 철저하게 우파로 산 것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주홍글씨를 지우기 위한 자기방어였을 것이다. 베트남전 상이용사는 지역의 유명인사가 보낸 화환을 패대기치면서 빨갱이가 죽었는데 무슨 화환이냐며 잘 죽었다고 폭언을 퍼붓는다. 그의 형도 아버지와 같이 산에 들어갔지만 총 맞아 죽었다. 왜 당신만 살아남았냐며 죽은 이에게 원망을 쏟아내지만 나중에는 아버지 덕분에 형의 죽음을 알게 되었고 형을 제대로 모실 수 있게 되었다고 딸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이런 화해와 따뜻한 결말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한다. 현실은 이념의 대립을 넘어 사회 전반에 걸친 반대파에 대한 혐오로 병들고 있다. 정치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혐오의 정치’는 국민의 의식을 병들게 한다. 갈등과 혐오의 끝은 어디일까. 상대방 죽이기에 몰두하는 정치와 그 하수인 노릇하는 언론을 보면서 과연 이 사회에 희망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나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