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93

김경윤 인문학자
김경윤 인문학자

[고양신문] 천상병 시인이 쓴 <나의 가난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 한 잔 커피와 갑 속에 두둑한 담배, /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만약에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라면 나는 행복합니다. 오늘 나는 커피 몇 잔을 마셨고, 아직 뜯지 않은 담배갑이 있고, 자가용을 타고 오므라이스를 먹었습니다. 커피를 마실 때, 담배를 필 때, 자가용을 탈 때, 오므라이스를 먹을 때, 나는 행복합니다.

시의 2연은 이렇게 전개됩니다. “오늘 아침 다소 서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도 /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하기 때문이다.”

아하, 나는 서럽습니다. 오늘 부족함이 없는데도 내일 일은 참으로 걱정입니다. 코로나 시기의 ‘막막하고 막연한 내일’로 걱정했고, 코로나가 끝나가는 요즘에는 ‘참담하고 비참한 내일’로 걱정합니다. 예전에는 내 걱정이 많았는데, 요즘은 나라가 참으로 걱정입니다. 잘못은 남이 했는데, 창피함은 내 몫입니다. 그 잘못이 반복될수록 창피함을 넘어 참담해지고, 심지어 비참해지기까지 합니다. 개인적 창피함을 넘어 집단적 비참함을 요즘 우리는 겪고 있습니다.

먹물들은 이럴 때, 현실을 도피하는 방법으로 사고의 영역을 무한대로 넓히기도 합니다. 우주물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존재는 원자의 결합과 유지, 해체를 반복합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은 우주의 탄생 이후 발생한 원자들의 결합에 불과합니다. 그 결합에는 목적도, 방향도, 의미도 없습니다. 목적도, 방향도, 의미도 없으니 기뻐하거나 슬퍼해야 할 근거도 없습니다.

역사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권력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권력의 교체에 크게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거지 같은 시간’도 언젠가는 끝날 것입니다. 서러움도 참담함도 비참함도 모두 인간이 만들어놓은 감정일 뿐입니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훌훌 떨쳐버리고 가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시인이 노래했듯이, 행복감과 서러움은 칼로 물을 베듯이 그렇게 싹뚝 갈라 우리 삶에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감정을 지워버리고 다른 감정으로 쉽게 이동하지 못합니다. 조증과 울증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러움을 안고 살아가면서 때로 행복감으로 그 서러움을 희석시킬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무덤을 찾아온 후손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괴로웠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불교가 증언하듯이, 우리의 삶은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것입니다. 득도한 사람은 그 바다를 다시 건너지 않겠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범인들은 이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괴롭게 고통을 견디며 그런대로 살아갑니다. 

평생을 고문 후유증과 음주벽으로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던 천상병 시인의 시를 읽으며 오늘 하루를 살아갑니다. 서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오늘 하루 커피를 마십니다. 담배를 피웁니다. 해장을 합니다. ‘보통의 하루’가 지나갑니다. 글 한 줄 못 쓰는 날들이 반복되더라도, 글을 못 쓰면 책을 읽으며, 마음에 가닿는 곳에 밑줄을 그으며,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바람이 무심하게 스쳐갑니다. 아내를 한의원에 데려다주며, 침 맞고 조금은 편안해진 아내를 집에 내려주며, 고통스런 삶이 조금은 덜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살면서 느낌표는 줄어들고, 물음표와 말줄임표가 늘어갑니다. 걸음은 느려지고, 눈은 침침해집니다. 늙어갑니다. 조증은 짧아지고 울증은 길어집니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한창인데 겨울잠을 잘 수 있다면, 일 분에 한 번만 숨쉬고 깊은 잠에 들고 싶습니다. 난, 아직 겨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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