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김택근 시인·작가
[고양신문] 못난 외교로 나라가 휘청거린다. 어쩌면 준비 안 된 대통령의 예고된 참사이다. 그러자 정치권은 일제히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소환했다. 1998년 대통령 김대중은 일본을 국빈 방문하여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공동선언 ‘21세기 한일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이날 오부치 총리는 식민지 지배로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준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
이날 김대중은 과거사 문제 외에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바로 일본의 대중문화를 개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둘러싸고 국내에서는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면 문화속국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다. 김대중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 문화의 잠재력을 믿었다. 문화만큼은 약소국이 아님을 역사 속에서 찾아냈다. 숱한 침략과 함께 그 많은 이민족 문화가 침투했음에도 우리가 지닌 역량으로 여과시켰음을 상기시켰다.
김대중의 예상대로 대중문화 개방 이후 우리의 드라마, 영화, 대중음악이 일본에 상륙했다. 한국의 스타들이 속속 일본으로 건너가 열도의 별이 되었다. 이른바 한류가 생겨났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 흐르는 한류의 발원지는 바로 김대중이다. 김대중의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막 퇴임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필자에게 <김대중 자서전> 집필을 부탁하는 자리였다.
딱 이맘 때, 2004년 4월이었다. 당시 김대중 사저에는 잔인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죽도록 일했던 재임기간 5년은 그에게 깊은 병을 안겨 주었다. 결국 신장투석을 받기 시작했다. 거기에 노무현 현직 대통령은 대북송금 특검으로 김대중의 가슴을 찢었다. 아무나 햇볕정책을 구기고 또 조롱했다. 낙조가 깃든 동교동은 적막강산이었다.
김대중도서관에서 만난 김대중의 모습은 너무도 초췌했다. 그럼에도 한 시간 남짓 얘기를 나눴다. 당시 언론은 한류가 점차 시들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자연 얘기가 한류 쪽으로 흘러갔다. 한류가 곧 사라질 것 같다는 예측을 김대중은 단호하게 일축했다.
“한류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인들이 계속 주시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재창조력은 생각할수록 대단합니다.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어도 우리는 해동불교로 만들었고, 고려 말에 성리학이 들어왔어도 이를 우리 것으로 다듬어서 지금 퇴계학은 세계 20여 나라가 학회를 만들어 연구하고 있습니다. 외국 문화를 받아들이더라도 우리 것으로 재창조하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감동이었다. 그는 가장 절망적인 시간에 가장 희망적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이를 변용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확신했다.
김대중은 선각자였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말라’는 문화정책은 모든 분야에서 꽃을 피웠다. 특히 한국영화가 르네상스를 맞는데 크게 기여했다. 영화인들이 ‘춘사 나운규 예술영화제’ 공로상 수상자로 퇴임한 김대중을 선정했다. 선정이유는 이렇다. “재임 중 스크린 쿼터를 지키고,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보장했으며, 1500억 원의 영화진흥기금을 조성하는 등 한국영화의 장기적인 발전에 버팀목이 되었다.”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취임초기에는 25퍼센트에 불과했지만 퇴임한 해인 2003년에는 53.5퍼센트로 높아졌다.
‘K’로 유통되는 문화상품들이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예술인들의 깊고 높은 작품들이 지구촌을 수놓고 있다. 최근 BTS(방탄소년단) 리더인 RM의 스페인 언론과의 인터뷰 기사를 마음으로 읽었다. ‘K’로 명명되고 있는 꼬리표가 지겹지 않냐고 묻자 RM이 답했다. “K-팝이라 하는 것이 지겨울 순 있지만 효과가 있어요. 우리의 선조들이 싸워서 일궈낸 우리의 퀄리티에 대한 일종의 인증마크랍니다.”
RM이 말한 ‘선조들이 일궈낸 퀄리티’란 바로 김대중이 가리킨 문화 잠재력에서 뿜어져 나온 것 아닌가. 기성세대들은 머뭇거리고 있지만 이처럼 젊은 예술가들은 거침이 없다. 우리의 문화유산에 추호의 의심도 없다. BTS 지민이 빌보드 메인싱글차트 ‘핫100’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으며 다시 김대중을 떠올려 본다. 그는 IT강국과 함께 문화 강국의 문을 열었다. 준비된 대통령 김대중, 봄비를 바라보니 더욱 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