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모임 중독자의 고백
- 조지 오웰 『동물 농장』
강당에 모여 ‘똘이장군’을 단체로 보던 반공교육 시절이었다. 매일같이 ‘때려잡자, 괴뢰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같은 메시지를 접하는 것이 어딘가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에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뒤뚱거리긴 하지만 두 발로 서는 돼지라니! 뒤룩뒤룩 찐 몸에 표독한 얼굴, 그리고 갈라진 발굽을 디디며 또박또박 걸어가는 돼지 한 마리. 한 농장의 동물들을 휘어잡는 그의 카리스마는 충격 그 자체였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걸 안 건, 20년쯤 지나서였다. 이 작품이 영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데다 정치적 의도를 분명하게 지닌 성인용 작품이라는 것도 최근 알았다. 우리나라에서 그걸 몰랐을 리 없고, 이걸로 ‘사회주의자는 나쁘다’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거겠지.
그동안 여러 독서 모임에서 『동물 농장』을 읽었더랬다. 정치적 불신이 팽배해질 때쯤이면 어김없이 선택하게 되는 책이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과 『1984』다.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고자 쓴 소설이겠지만,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어떤 공포 정치를 몰고 올 것인지를 예견하고 있기에 시대를 넘나드는 작품으로 평가받는 듯싶다.
그럼에도 이번 모임에서는 한 가지 전제를 달았다. 작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좋으나 현 국내 정치 상황에 대해 언급하지는 말 것. 참여자들이 정치적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이미 답 없는 정치권에 대해서 불평불만을 내놓아 봤자 피곤하기만 할 테니까. 물론 이것은 내 생각이고, 리더이기에 양해를 구하고 언급을 자제하자고 부탁했다. 어쩌면 내 정치적 피로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독서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스노볼’(트로츠키를 대변)이 모든 동물이 준수해야 한다고 제정한 일곱 계명이다.
1. 무엇이건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 2. 무엇이건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친구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동안 동물을 착취해 온 ‘인간’을 적대시하고, 인간처럼은 행동하지 말자는 취지다. 만약 내가 우연히, 또는 의도해서 혁명을 일으켰다면 어떤 계명을 내세울 것인가. 지옥 같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떤 지침을 지켜야 할까? 세세한 지침을 명문화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법리적 다툼이 가능하도록 대전제만 살려 놓는 게 좋을까. 스노볼이 제시한 일곱 계명은 대부분 문자를 모르는 동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최소한의 법률이다. 무조건적인 복종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 계명은 핍박의 역사를 담고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동물이 문자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논의를 통해 계명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면 된다.
그런데 스노볼을 축출한 ‘나폴레옹’(스탈린을 대변)을 곧바로 이 계명에 수정을 가하기 시작하더니, 최종적으로 단 하나의 계명만을 남긴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여기서의 평등은 계급을 전제로 한 평등이다. ‘평등’은 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을 말한다. 그런데 ‘더 평등’하다는 것은 계급에 따라 차별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폴레옹이 말하는 평등은 실현되고 있으므로 인간으로부터의 해방,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자유’는 제한한다. 그리고 노동자를 대표하는 ‘복서’는 언젠가 찾아올 자유를 위해 기꺼이 불평등을 감수한다. 그러나 그는 죽음으로써 자유로워진다.
현 정부에서는 평등보다는 늘 ‘자유’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모든 대한민국 국민은 자유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닐까? ‘모든 대한민국 국민은 자유롭다. 그러나 어떤 국민은 더 자유롭다.’ 그러니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하는 거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