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성경 말씀이다. 그러나 웬만한 사람들은 생색나는 일에 끌리게 마련이다. 만 원 어치 기부를 하고 백만 원 어치 생색을 내고 싶어하는 모습도 더러 본다.
『줬으면 그만이지』는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라는 부제가 붙은 책의 제목이다. 지난 1월 23일과 24일 양일간 MBC 설날 특집으로 전국에 방영된 <어른 김장하>란 다큐멘터리 주인공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란 말이 들린다. “꼰대는 많지만 어른은 없다”란 심한 말도 들린다. 따져보면 어른, 연장자들이 공경받던 시대는 농경사회였다. 자연순리에 맞춰 지어야 하는 농사에서 다년간의 경험과 지혜는 매우 소중하였다. 어떤 작물을 언제, 어떤 조건에서 씨 뿌리고 가꾸어야 하는지, 자연재난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을 알려줄, 선험적 지식과 경험을 가진 어른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노인 하나가 죽으면 마을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아프리카 격언은 이런 사회를 반영한다.
그러나 속도와 새로운 것이 생명인 디지털 시대에는 이런 선험적 지식은 낡고 쓸모없는 것이 된다. 챗 지피티(Chat GPT) 같은, 입에 올리기에도 여전히 생소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세상 모든 문제에 답을 갖고 있는 듯 보이는 시대에, “라떼에는…” 운운하는 ‘어른’들이 설 자리는 없다.
자신이 가진 전 재산(110억 상당)을, 살고 있는 집 빼고는 전부 다 지역사회에 기부하고, 평생 1000여 명 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으며, 지역의 언론, 문화예술, 사회, 노동, 여성, 청년, 평화, 환경 운동을 후원하면서도 자신은 그 흔한 승용차 하나 갖지 않았던 진주 부자 김장하. 그의 위대함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었으면서도 절대로 내색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말 그대로 “줬으면 그만이지”, 그것으로 생색을 내거나 티를 내지 않았다. 위에 말한 ‘취재기’도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한 김장하 선생을 저자인 김주완 기자가 몇 년간 쫓아다니며 쓴 ‘취재기’이지 그와의 대담집이나 ‘평전’도 아니다.
돈에 대한 그의 철학도 돋보인다.
“돈이란 게 똥과 같아서, 모아 놓으면 악취가 진동하지만 밭에 뿌려 놓으면 좋은 거름이 된다.”
“장학금을 받고도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는 옛 장학생에게 김장하는 말한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해 온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 4년 내내 그의 장학금을 받고 사법고시에 합격했던 문형배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2019년 4월 9일 국회 인사청문회 모두 발언을 김장하 이야기로 시작했다.
“김장하 선생은 제게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며, 박애로 공동체를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아라’고 하신 선생의 말씀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김장하 선생 이야기는 “어른이 없다”는 시대에 우리에게 ‘어른’의 의미를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 “저 분을 닮고 싶다”, “저 분을 따라 살고 싶다”는 반응들이 김장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나온 반응들이다. 젊은 사람들이, 후세, 후배들이 닮고 싶어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우리 시대의 어른이 아니겠는가?
김장하가 몸담고 살아온 진주는 오랜 역사와 이야깃거리를 안고 있는 고장이다. 진주성 전투와 논개의 이야기가 살아있고, 우리 사회 최초의 신분해방혁명이었던 형평 운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박경리의 『토지』나 이병주의 『지리산』 등 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우리 고양시도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특히 신도시 개발 이후로는 전통과 현대가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 지역에도 곳곳에 ‘어른’들의 이야기가 숨어있을 법하다.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내 우리 이야기를 만들어가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