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94

김경윤 인문학자
김경윤 인문학자

[고양신문] 사회가 척박할수록 언어는 과격하고 피폐해집니다. 정치적 견해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수꼴(수구꼴통의 준말)’과 ‘좌빨(좌익빨갱이의 준말)’이라는 용어가 준동합니다. 도대체 대한민국 국민의 10%도 포괄하지 못하는 말로 대한민국 국민을 양분하는 이런 언어의 야만화는 이제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요? 상대방의 나쁜 점을 드러낸다고 해서 나의 좋은 점이 증명되지 않듯이, 혐오와 증오의 언어는 어떤 사회적 개선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이와는 다른 사례지만 과거 80년대에 운동권 내에서도 자신(지식인)만 알아들을 수 있는 지하세계의 언어를 생산하고 유통시킨 적이 있습니다. ‘NL(민족해방의 약어)’이니 ‘PD(민중민주주의의 약어)’니 ‘CA(제헌의회의 약어)’ 등으로 자신이나 상대방을 칭하면서 서로를 치열하게 물어뜯었습니다. 그로부터 세월이 40년이나 흘렀지만, 아직도 술자리에 가면 이 낡고 오래된 용어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어색하고 무안해집니다. 요즘 청소년 세대에게 이 용어를 말하면, 제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NL은 내셔널 리그의 약자로, PD는 방송사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감독으로, CA는 학교의 특별활동 시간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시대착오적인 정치적 색칠하기를 계속할 필요는 없습니다.  

혐오와 증오의 언어, 낙인찍기의 언어는 이성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감성조차 파괴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민주주의는 냉철한 이성뿐만 아니라 따뜻한 감성을 통해서 개선되고 확장됩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성적 가치는 박애라는 감성의 양태 속에서 작동합니다. 지적 활동의 토대는 감성적 유대감입니다. 너와 내가 달라도 너와 나는 따뜻한 피가 흐르는 존귀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지적인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상호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려는 공동체적 활동 또한 상호 존중이라는 위대한 감성이 밑바닥에 뿌리내리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때려잡아 죽여야 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정의롭다고 자임하는 자들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서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과정이 민주주의의 실체입니다. 연인들은 서로 미우면 헤어질 수 있지만, 인류공동체는 미워도 함께 생존할 수 있는 지혜를 마련해야 합니다.

나 홀로 옳고, 나 홀로 살아남으려면 독재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함께 소통하고 함께 살아가려면 민주주의가 필요합니다. 문제점을 깔끔하게 제거하고 해결책에 대한 가장 빠른 방법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독재를 바랄지 모르겠습니다만, 문제점이 무엇인지 서로 토론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신중하게 모색하려면 민주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제도입니다. 그 늘어지는 시간을 감수하고 늘어나는 비용을 긍정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해도 상대방이 이야기할 때에는 충분히 시간을 주고 진심으로 경청할 수 있는 친절함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이 어리석은 말을 해도 그 진의는 무엇인지 찾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감성은 완성된 자들끼리 교환하는 환호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들끼리 나누는 응원입니다. 

인내심, 친절함, 사랑은 우리가 훌륭하기 때문에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형편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서로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마음가짐이며 감성입니다. 이 감성이 없다면 이성은 늘 불구입니다. 감성민주주의가 없다면 이성민주주의는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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