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고양신문] 이태원 참사 이후 지하철역에 완장 타고 유니폼 입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을 나가는 순간 전보다 더 안전해졌다는 느낌을 갖기 어렵다. 왜 그럴까? 우리의 안전감수성이 여전히 낮기 때문이다.

아침 학교 앞 스쿨존 모습이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학교 정문 근처 주정차를 하지 마시라.”는 가정통신문을 부모들은 이해할 줄 모른다. 가능하면 아이들이 북적이는 교문 앞 가까이 차를 세운다. 내린 내 아이, 지나가는 아이들이 모두 섞여서 (스쿨존에) 불법 주정차한 차 사이를 지나 교문으로 향한다. 일부 부모들이라고? 아무렇게나 내 아이를 내려주거나 태우는 부모들에게 누구도 한마디 직접 하지 못하는 사회다. 모두가 공범이다. 아이들 안전 때문에 가슴 졸이는 선생님들만 사방으로 뛰어다니지만 역부족이다.

오후가 되면 더 가관이다. 학교 앞을 불법 주정차한 학원차들이 점령하고 있다. 시동도 끄지 않은 채 10분이고 20분이고 서 있다. 차로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 것만 안전에 해당하지 않는다. 스쿨존에서 유해식품을 팔지 못하게 하는 논리와 마찬가지로 엔진공회전 역시 신체적 안전을 해치는 행위라서 과태료 부과 대상이다. 경기도 조례에 따르면 최대 100만원 과태료 부과가 될 수 있다. 결국 단속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담당 구청 공무원에게 전화로 여러 번 단속을 요청했다가 포기한 지 1년이 넘었다. 전화 받고 나가서 보니 그런 차들 없었고, 매일 나가서 단속할 수 없다는 답만 들었다.

횡단보도 앞 우선 정지를 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물게 되었다. 법규정은 바뀌었지만 우리의 의식은 바뀌지 않았다. 사람이 보이면 서는 차들이 생긴 건 맞다. 과태료를 내야 할 것 같은 ‘사거리’에서는 가끔 그런 차를 본다. 그러나 이면도로에서 사람 먼저 가라고 횡단보도 앞에서 서는 차 보신 기억 있으신가? 지나가는 사람이나 차나 모두 사람보다 차가 먼저다. 자동차를 보면 건너려는 사람도 멈춘다. 횡단보도에서 서지 않는 차, 바로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차를 봐도 우리는 화가 나지 않는다. 아니 사실 별 생각 없다. 안전에 대한 기대 수준, 안전감수성이 낮은 탓이다.

우리의 안전감수성은 ‘사고만 나지 않으면 되는 상태’로 그 기준이 고정되어 있다. 불용예산 처리 때문에 멀쩡한 길을 연말만 되면 파헤치기는해도, 우선 학교 앞부터 시작하여 우회전 신호등을 설치할 돈은 없다. 왕복 2차선 좁은 도로에서는 시속 10km 이하 ‘걷는 속도’ 규정을 만들 아이디어는 유권자(운전자)의 반발을 의식해서인지 내놓지도 못한다. 

시내도로에서야 그렇다 치더라도, 고속화 도로에 나가서도 왼쪽 차선을 점령한 채 앞만 보고 운전을 하는게 우리의 모습이다. 앞만 보고 조심스럽게 달려야 ‘안전한’ 운전이다. 그런데 속도 제한 규정이 있어도 도로에는 빠르게 가는 차와 느리게 가는 차가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추월을 하고 누군가는 추월을 허용해야 한다. 그래서 1차 추월차로, 2차 승용차로, 3~4차 버스ㆍ화물차로 구별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속도 제한을 전제로, 느린 차가 오른쪽 차로로만 달리면 그게 제일 안전하다. 추월 과정에서 서로에게 시야 방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만 보고 달리는 소신 운전이 제일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추월해 가는 운전자들이 어리석어 보일 뿐 그렇게 안전하지 않는 상황의 원인을 내가 제공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무엇이 안전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안전감수성을 기준으로 외치는 안전은 진짜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사람을 보면 설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시야을 막는지 아닌지 알지도 못하는 안전 감수성을 갖고서 어떤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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