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모임 중독자의 고백

- 『종이달』 (가쿠다 미쓰요, 위즈덤하우스)

[고양신문] 2021년 기준, 대한민국 여성 임금 노동자의 월 평균임금은 247만6000원. 남성은 383만3000원이다. 2006년 대비 2021년 월평균 임금 증가율은 여성(75.2%)이 남성(56.4%)보다 높다. 여성 노동자의 임금이 꽤 상승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남성이 여성에 비해 60퍼센트나 임금이 높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통계에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여성의 그림자 노동에 대한 비용과 특수형태 근로 노동자(프리랜서 등)는 포함되지 않는다.

2019년 나는 임금 노동자의 생활을 그만두었다. 다시는 임금 노동자로 살지 않으리라, 돈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는 남편이 있기에 내린 결단이기도 했다. 남편은 혼자서 돈을 번다고 유세하지 않았다. 가사노동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본인 명의의 신용카드 한 장을 주며, 생활비 명목으로 쓰라고 했다. 남편이 구체적인 항목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개인’ 생활비가 아니라는 걸 눈치껏 짐작했다. 커피를 사 먹고 책을 사 보는 것에는 그 카드를 쓸 수 없었다. 그 카드는 지금도 장 볼 때와 병원 갈 때만 사용한다. 결제할 때마다 남편 휴대전화로 알림 문자가 갈 텐데, 개인 생활 항목 때문에 변명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2019년부터 여성 임금 노동자의 월 평균임금에 훨씬 못 미치는 돈으로 개인 생활을 하고 있다. 어쩐지 임금 노동자 때보다 마음이 편하고 경제적으로도 더 풍족하다. 고정수입이 없기 때문에 보험금도, 관리비도, 적금도 모두 남편 월급에 의존하고 있다. 난 가족으로서 적당한 가사노동만 하면 된다. 내가 프리랜서로서 버는 비정기적인 돈은 오롯이 내 몫이다. 가끔 호기롭게 남편을 위해 비싼 선물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점에 데려가기도 한다. 막 쓰지 말고 잘 모아두라는 남편의 충고 따위는 귓등으로 흘려듣는다. 

최근 종영을 앞둔 드라마 <종이달>의 원작 『종이달』의 주인공에 이끌린 것도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경제적 우월감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남편에게 위화감을 느끼던 여자는 은행의 계약직 사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일의 즐거움을 느낀다. 남편 월급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수입이지만, 자신이 번 돈으로 남편을 위해 비싼 밥을 사고 싶었던 주인공. 그러나 남편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는다. 저렴한 선술집을 갔고, 계산도 남편이 했다. ‘계산대에서 여자한테 돈 내게 하는 것, 꼴불견이잖아. 지금 만 엔짜리 주면 이 잔돈 그대로 줄게.’

그리고 얼마 뒤 남편은 아내를 비싼 초밥집으로 데려갔다. ‘아무리 한턱 쏜다고 해도 시간제 사원은 보너스도 안 나오고, 한 달 월급으로 이런 가게 가자고 할 수도 없지.’ 남편은 아내의 일도, 돈도 무시하며, 자신이 먹여 살리고 있음을 으스대고 싶어 했다. 아내의 벌이를 푼돈 취급하고, 경제력 때문에 가정 내 권력의 위치가 바뀔 수 없음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돈은 자존심이자 권력이었다. 

물론 내 남편은 소설 속 남편과 다르다. 내 통장 잔고를 궁금해하기는 하지만, 권력이 뒤집어질 것을 염려하지는 않는 듯하다. 생활비 카드를 손대지 않고도, 나름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재미있게 사는구나 정도로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가끔 비싸고 맛있는 걸 사 주는 일은 일상의 선물 같은 것이고. 

『종이달』의 주인공 리카는 계속되는 남편의 무관심과 경제적 가스라이팅 때문에 결국 공금에 손을 댄다. 남편이 무시하면 할수록 돈으로 자신을 치장한다. 언제 들킬지 몰라 숨막히도록 불안하지만, 한편으로는 드디어 진짜 나, 진짜 행복을 맛보는 기분이다. 돈을 쓰는 자신에게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하니까. 리카는 돈에 완벽하게 지배당하고 나서야, 그곳에서 자신을 나가게 해 달라고 손을 내민다. 

김민애 출판편집자
김민애 출판편집자

통장 잔고의 맨 앞자리 숫자가 바뀔 때마다 약간 불안하다. 언젠가 나도 리카처럼 생활비 카드를 내 돈처럼 쓰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다행히 난 리카와 달리 애인도 없고, 명품이나 화장품 따위에 관심이 없다. 앞으로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가 아니라 ‘나 좀 맛있는 거 사 줘’라고 말할 날이 더 많겠지만, 처음부터 경제권은 내가 쥐고 있지 않았으니 무슨 상관이랴. 돈에 지배당하지 않는 방법은 뻔뻔해지는 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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