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생 신지혜]
[고양신문] 햇볕이 아주 뜨거운 날, 햇빛을 마주하고 국회 정문 앞에 섰다. 내 옆엔 ‘전세사기 깡통전세 특별법을 제정하라!’ 피켓을 든 여성이 섰다. 기자회견이 시작되고 곧 그의 발언 순서가 됐다. 한 손에 마이크를 들고, 다른 손엔 피켓과 피해자의 사연이 든 핸드폰이 동시에 들렸다. 그가 조금은 편하게 발언할 수 있게 그가 든 피켓을 함께 받쳐 들었다.
그는 자신을 ‘빌라의 신’의 피해자라고 소개했다. ‘빌라의 신’은 전국에 3400여 채 집을 소유한 전세 사기단이다. 건축업자와 분양대행사가 결탁하고, 리베이트를 챙긴 공인중개사까지 합세한 범죄였다. 그들은 같은 휴대폰 번호 끝네자리를 쓸 만큼 조직적이었고, 분양과 전세계약을 동시 진행하는 사기 수법을 썼다.
계약 기간이 끝나도 세입자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는데, 경매도 진행할 수 없었다. 세금 체납으로 세무서가 집을 압류했는데, 세금은 한 데 묶여 있는 탓이었다. 정부여당 특별법에 체납한 세금을 부동산에 나눠 부과하는 ‘조세채권 안분’ 내용이 있다. 하지만 그는 보증금 기준 등으로 인해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화사한 햇살조차 무겁게 느껴지는 사연을 듣는데, 갑자기 함께 받쳐 든 피켓이 떨렸다. 그의 손이 떨렸기 때문이었다. 전세 사기꾼이 체납한 세금을 세입자가 대신 떠안아야 하는 부당함을 말할 때는 떨지 않았다. 하지만 9살 아이를 혼자 키우는데 전세 사기 피해까지 덮쳐 벅찬 현실을 말할 때 흔들린 그의 손에서 버거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돌이켜보면 ‘빌라의 신’ 사기 수법처럼 전세 계약과 매매가 동시 진행되는 상황을 나도 경험했다. 오전에 잔금을 치르고 이사했는데, 같은 날 오후 임대인이 그 집을 판다는 사실을 공인중개사에게서 우연히 들었다. 보증금을 끼고 매매하는 ‘갭투기’가 성행이라는 건 알았지만, 내가 대출한 보증금이 그 대상이 될 줄은 몰랐다. 그의 떨림은 누구나 전세 사기 피해자가 될 수 있게 정부가 판을 깔아놓고 막상 피해가 생긴 뒤에 피해자를 혈세 낭비하는 존재로 치부하는 정부에 대한 울분이기도 했다.
피해자 3명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정부여당이 대책 마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피해자가 손 떨 정도로 울분을 토하는 것은 피해자 범위를 최대한 좁혀 피해자 솎아내기 바쁜 특별법 내용을 내놨기 때문이다. 전세 사기 피해 양상은 다양한데, 피해 구제책은 경매해서 사든지 공공임대로 그 집에서 계속 살든지만 택해야 할 만큼 지나치게 한정적이었다.
자기 자본 없이도 수천 채의 집을 사들일 수 있게 한 정책 때문에 전세 사기 범죄자들이 왕이나 신이 되는 사이 정부여당은 ‘모든 사기는 평등하다’ 같은 망언만 한다. 피해자는 평등하게 구제하지 않고, 가해자는 왕과 신으로 불리는 게 정부여당이 말하는 ‘정상화’인가. 집값 떠받치겠다고 부동산으로 돈 벌게 해주겠다고 부추긴 정책이 가해자를 만들었고, 그저 내 몸 하나 편히 쉴 주거 공간이 필요했던 서민을 피해자로 내몰았다.
전세 사기 범죄는 정부 정책을 먹고 자랐다. 이미 전세 사기 피해자 4명이 제대로 된 구제 한 번 못 받아보고 세상을 떠났다. 피해에 대한 최소한의 구제책을 내놓는 것이 정상적인 국가라는 걸 정부여당이 보여줄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