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작가
이인숙 작가

[고양신문] 옛날 사람들은 악정(惡政)이 호환(虎患)보다 무섭다고 했다. 인왕산에 호랑이가 살던 시절, 사람을 물어가는 호랑이는 백성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악정이었다. 포학한 정치, 위정자의 무능과 무지로 국가가 위기에 빠지거나 호가호위하는 자들의 횡포가 모두 백성을 괴롭히는 악정이었다. 임진왜란 때의 선조, 병자호란을 불러온 인조 모두 무능할 뿐 아니라 용렬하기 짝이 없는 못난 왕들이었다. 특히 명,청 교체기에 두 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을 쫓아내고 명나라에 올인하다가 병자호란을 자초한 인조는 잘못된 외교로 전쟁의 참화를 불러온 장본인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위기가 만만치 않다. 경제는 곤두박질쳐서 작년 한 해 무역적자가 사상 최대 규모인 472억 달러를 기록했고 올해는 4개월 만에 벌써 작년 적자의 절반을 넘어섰다. 14개월째 적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는 건국 이래 최초라고 한다. 수교 이래 한국의 최대 무역 흑자국이었던 중국이 최근에는 제1의 무역적자국이 되었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미국 일본에 올인하고 중국 러시아에 적대적 발언을 하는 정부의 외교 실책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실을 도청해도 항의는커녕 미국을 감싸주기에 급급하고, 미국 일본에 대한 굴욕외교, 퍼주기에 국민들은 모욕감과 함께 경제 불안에 한숨 쉰다. 현대자동차가 러시아에서 철수하고, 한국 경제의 중요한 버팀목인 자동차와 반도체는 미국의 막무가내식 요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정부의 제대로 된 대응은 없다.  

  미국 방문을 앞두고 쏟아낸 대통령의 발언들은 경제 위기를 넘어 우리 안보까지 위협하고 있다. 중국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대만 문제를 거론하자 중국은 불장난하지 말라며 경고했고,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제공할 가능성을 시사하자 러시아 역시 북한을 들먹이며 협박했다. 미국은 멀고 중국과 러시아는 지리적으로 이웃한 강대국이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왜 굳이 해서 경제, 안보의 위기를 자초할까. 미중 갈등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끼어들어 미국이 좋아할 일만 한다면 대한민국의 안보는 안심해도 좋은가. 한반도에 전쟁 위협이 높아간다는 걱정이 들린다. 수백 년 전 광해군의 영리한 균형외교가 절실한 시점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휩쓸던 해에 경쟁작이었던 영화 <1917>이 있었다. 지난해에는 독일 작가 레마르크의 소설을 세 번째 영화화한 <서부전선 이상 없다>가 나왔다. 두 영화 모두 일차대전 중인 1917년이 배경이다. 전자는 영국 병사의 시선으로, 후자는 독일 병사의 시점으로 다룬 것이 차이이다. 그러나 참호전이었던 일차대전의 참혹함은 두 영화가 더하고 덜할 게 없다. 퍼붓는 폭우에 참호의 물을 퍼내고 절벅거리는 참호와 벙커에는 쥐가 들끓는다. 참호 밖으로 나가면 포탄이 쏟아지고 철망에 걸려 몸이 찢긴다. 사방에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시신이 널려있다. 전쟁영웅이 되겠다는 열광적인 분위기에 휩쓸린 17살의 독일 소년 넷이 부모의 서명까지 위조해서 자원입대했다. 전선에 나간 첫날부터 맞닥뜨린 참혹한 상황, 친구들은 하나씩 죽어간다. 

  천만이 넘는 희생자를 낳은 일차대전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전쟁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사건이 전 유럽과 오스만 제국까지 참전한 세계대전으로 확대된 결정적 원인은 독일 빌헬름 2세의 외교적 실책이었다. 유럽 국가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사이가 좋지 않았던 러시아 등과 동맹외교를 펼쳤던 노련한 재상 비스마르크, 그를 해임하고 제국을 만들겠다는 야심으로 균형외교를 깨트린 어리석은 지도자의 실책으로 무수한 젊은이들이 전쟁에 내몰려 죽었다. 패전으로 빌헬름 2세는 폐위당하고 망명했지만 망명지에서도 재산을 보전하고 유유자적하며 23년이나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영화를 보면서 그가 비록 폐위당하기는 했지만 젊은이들의 참혹한 죽음과 무관하게 안락한 여생을 보낸 것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 

  김유신은 잠든 자신을 태우고 발을 끊기로 했던 기생집에 데려간 말의 목을 잘랐다. 그는 죄 없는 말의 목을 베었지만, 폭주하는 말에 올라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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