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춘향전의 하이라이트는 어쨌거나 “암행어사 출또야!”가 나오는 장면이고, 심청전의 클라이막스는 죽은 줄 알았던 심청을 만난 아비 심봉사의 눈이 번쩍 뜨이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피 엔딩, 클라이막스에 오르기 전에는 반드시 관객들의 혀를 차게 만드는 안타깝고 어두운 절망적 장면이 있으니, 그것은 춘향과 월매 앞에 폐포파립(敝袍破笠) 거지꼴로 나타난 이몽룡의 모습이고, 왕비가 되었어도 끝내 아버지 심봉사를 찾지 못하는 심청의 애끓는 모습이다. 그래서 관중들의 안타까움이 컸던 만큼 상황을 일거에 뒤집어엎는 반전의 묘미도 크다.
조선왕조 시절 일반 서민들의 생활은 별반 특별할 것이 없었다. 사농공상의 신분제 사회에서 맨 꼭대기를 차지한 양반들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 생활이란 기껏해야 나라에 세금 바치고, 땅 가진 양반들 곳간 채워주고, 사내아이 낳으면 군역(軍役)에 바쳐야 하는, 그래서 먹는 입(食口) 하나가 무서운 그런 생활이었을 것이다. 지방고을 수령이나 아전들의 수탈과 횡포는 기본 버전이어서 다산 정약용 같은 청백리의 『목민심서』는 귀한 지침서가 되었다. 봉건사회에서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한 손에 쥔 고을 원님의 권세는 또한 대단한 것이어서 관아 마당에 끌려간 죄인은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는 호통 속에 자기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내야 했다. 이렇게 그날이 그날인 일반 백성들은 거지꼴로 나타난 이몽룡이 “암행어사 출또”를 외치면서 변학도의 술판을 뒤엎는 통쾌한 장면에 큰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뜬금없이 웬 춘향전, 심청전 이야기인가 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하지만 요새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다 보면 자꾸 뒤로,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이렇게 가다가는 과연 세상이 어디까지 “빠꾸”하나 하는 걱정이 든다.
사실 뜬금없기는 최근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는 고양시청 이전 문제가 춘향전 이야기보다 더 뜬금없어 보인다. 지역사회와 지역의 대의기관인 시 의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법령과 절차에 따라 협의, 결정하고 이미 100억 가까운 시민 혈세가 투입된 사업을, 단지 전임 시장이 결정한 사업이라고 해서 어떤 의견 수렴절차도 없이 시장 혼자 독단으로 백지화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가? 이동환 시장은 설마 꿈에서라도 민선 시장직을 과거 왕조시대 고을 사또의 자리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시청 이전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란을 지켜보는 나는 고양시민으로서 매우 자존심이 상한다. 설마 시장이 시민들을 자신이 어떻게 결정하든 “네네”하며 움직여 줄 “장기판의 졸”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경과로 보아서 시청 이전 논의에 시민을 존중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고양시에 산적한 여러 가지 과제들로 볼 때 시청 이전 문제는 완전히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일이다. 더구나 이 문제가 덕양과 일산 간 지역주의 갈등으로 번질 조짐까지 보이는 것은 매우 걱정스럽다.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시민들을 분열시키고 시민들과 맞서면서까지 벌이는 것이 과연 ‘민의에 의해 선출된’ 시장이 할 일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을 보나 나라 전체로 보나, 언젠가부터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져 왔던 일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가 않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할 권리가 조폭들의 행태로 폄하되고(건폭), 시민들의 자유로운 집회, 시위의 권리도 위협받고 있다.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내린 물대포 사용 논의가 여권 일각에서 다시 나오는 것도 우려스럽다. ‘욱일승천기’를 단 일본 해상자위대 군함이 부산항에 들어오는 상황에서, 국민을 지키고 국가 이익을 우선해야 할 정부는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를 둘러싸고 누구 편인지 알 수 없는 수상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이 와중에 일본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는 징용피해자들의 호소는 돈 몇 푼에 해결할 문제 정도로 격하되고 있다.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감.’ 국어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는 “사필귀정”의 뜻이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더디지만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역사는 앞으로 나아왔다. 잘못됐던 일들이 고쳐지고, 새롭게 평가받아 왔다. 단순히 춘향전 등의 고전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지난했던 민주화 운동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춘향전에서 관중들은 자신들을 대신하여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이몽룡이라는 주역에 열광한다. 그러나 오늘 역사의 현장에서는 우리 모두가 주연이고 주역이다. 촛불을 들었던 하나하나의 시민들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