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약사가 들려주는 약 이야기]
심인성 발열과 해열제

심리적 문제로 체온 올라가는 ‘심인성 발열’
우울증, 식욕부진 등 다양한 증상 동반  
단순한 해열제 복용으로는 해결 못 해
아이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어 주의 필요

 
[고양신문] 일본 큐슈대 의대 심신의학과 오카 타카카주 교수에게 어느 날 한 소녀 환자가 찾아왔다. 중학교에 다니는 15세의 소녀는 특이한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집에 있을 때는 멀쩡하다가 학교에만 가면 가슴이 답답해지며 열이 생기고 극도의 피로감을 느껴서 조퇴하기가 일쑤였다. 병원에서는 해열제를 처방했지만 소용이 없었기에 심리적인 문제라고 판단해 오카 교수를 소개한 것이다. 오카 교수는 소녀에게 체온계를 주며 하루 네 차례(오전 8시, 12시, 오후 4시, 8시) 겨드랑이 온도를 기록하라고 부탁했다. 며칠 뒤 소녀가 갖고 온 체온 데이터를 보니 정말 학교에만 가면 체온이 2도나 오르는 것이 확인되었다.

해열제가 효과는 없었지만 소녀가 느낀 열감은 진짜였고, 오카 교수는 소녀의 증상을 ‘심인성 발열(psychogenic fever)’이라고 진단하게 된다. 이는 심적 요인인 스트레스가 체온을 올리는 현상으로 1914년 학계에 처음 보고되었고1930년에 이런 이름을 얻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 시집살이가 심하던 시절 며느리들이 만성 스트레스로 마음고생을 하며 얻은 ‘화병(火病)’도 심인성 발열이 주요 증상이었을 것이다. 

세계적인 학술지인 <사이언스> 2020년 3월 6일 자에는 스트레스가 발열로 이어지게 하는 뇌의 회로를 밝힌 연구결과가 실렸다. 일본 나고야대 의대 통합생리학과 나카무라 카주히로 교수팀은 20년 가까운 연구 끝에 이러한 심인성 발열 경로(뇌의 DP/DTT 영역)를 규명하였고, 또한 실험 쥐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부 체온은 올라가지만 말단은 정맥이 수축해 체온이 내려감을 꼬리의 체온으로 확인하였다. 비록 동물실험(쥐) 결과이지만 포유류의 뇌 구조 대부분이 진화적으로 보존돼 있기 때문에 사람에서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실험으로 감염(염증반응)과 스트레스(투쟁 도피 반응)는 발열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이 다른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감기, 독감 등 세균 및 바이러스 감염 등에 의해 발생되는 열은 당연히 타이레놀Ⓡ과 같은 해열제를 복용하여 대처를 하지만 스트레스에 의한 열은 단순하게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기와 같은 감염질환에 의한 염증성 발열은 바이러스나 세균으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해 인체의 면역활동이 활발해질 때 체온이 상승하며 점차 고열로 이어진다. 반면에 심인성 발열은 37도 초반 정도의 높지 않은 체온에서도 강한 권태감이 나타나기도 하고 다양한 증상이 동시에 병발하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우울증이나 공황 장애 같은 정신 질환부터 복통이나 두통, 식욕 부진과 같은 신체 증상인데, 그 이유는 자율신경의 혼란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마음의 상태가 영향을 받아 자율신경에 의한 체온 조절 기능에 이상이 생겨 열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율신경 혼란 중에서도 현대인의 교감신경 항진은 각종 스트레스와 더불어 넘쳐나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음식들에서도 기인한다. 즉, 힘든 인간관계, 과중된 업무, 경제상의 생활고 등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육류의 과다섭취, 에너지 음료, 인스턴트 식품, 밀가루 음식 등의 섭취율이 높은 것이다. 또한 과식을 하고 움직임이 적으며, 수면 시간이 부족한 것 등도 원인이 된다. 이런 교감신경 항진의 결과로 심인성발열이 생기고, 인체에서는 가장 중요한 뇌의 활동을 촉진하므로 뇌에 에너지를 집중하고자 다른 부위에 에너지를 빼앗아 간다. 결과로 수족냉증, 소화장애 등이 생기고, 인슐린 저항성이 생겨서 만성질환으로도 이어지게 된다. 

교감신경의 항진이나 심인성 발열은 인체의 체액을 산화시키게 되는데, 특히 세포막의 주성분인 인지질이 산화되면 세포막은 산소가 통과하지 못하게 된다. 최악의 경우 산소가 통과되지 못한 세포들은 암세포로 전환되며 몸에서는 여기저기 염증이 생기기 시작한다. 뇌막의 성분도 인지질이어서 산소부족으로 인한 두통 및 어지러움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이처럼 심인성 발열에 노출이 되면 지속적인 열과 함께 만성적인 두통과 몸의 통증으로 인해 고생하지만 병원에서 MRI 검사 등에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진통제를 복용하며 고생하는 환자들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약국에서는 이런 경우의 환자들이 우황청심환, 천왕보심단 등의 한약제제들을 구매해 가기도 한다.

약국 근무 중에 보면 아이들에게도 심인성 발열 증상이 발견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아이들도 스트레스로 인해 마음이 피폐해지기 때문이다. 원인은 가정에서의 학대, 주위의 지나친 기대, 친구나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성적에 대한 불안감 등이 있다. 아이들은 사회적 경험이 적어서 나름대로의 스트레스 푸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지속적으로 관심 있게 관찰하는 어른들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이다.

※ 조기성 약사는 원당시장 앞에서 17년째 한국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우리동네 약사님’이다.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에 대한 공부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병을 이기는 건강법은 따로 있다』, 『감기는 굶어야 낫는다』 등의 저서를 펴냈다. 현재 고양시약사회 감사, 대한약사회 한약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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