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본 세상 - 『붉은신』(오승민/ 만만한책방)

[고양신문] “가장 약한 쥐에게 붙이는 이름이래. 하지만 할아비 쥐가 그랬어. 끝이 없으면 시작도 없다고.” 꼬리끝. 작은 생쥐는 가장 약하게 태어났지만 눈먼 하얀 할아비 쥐가 노래한 붉은신을 만나러 길을 나선다. 생명을 살리는 신. 죽음에서 삶으로 돌려보내 주는 붉은신. 그리고 마침내 붉은신을 만날 수 있다는 하얀 배를 찾아낸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장면은 처참했다. 작은 통에 갇혀 얼굴만 살아있는 토끼들, 얼굴이 여러 개인 개구리들. 아픈 개와 각각 유리관에 갇혀 소리치는 하얀 쥐들. “우리는 위대한 실험 쥐야! 우리가 두발이들을 살리지!” 

비참해진 꼬리끝 눈에 창 너머 붉은 그 무언가가 보인다. 
‘창밖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커다란 불덩이가 거기 있었다.’ 꼬리끝은 붉은신이 가까이 있다는 걸 깨닫고 하얀 배를 벗어나기로 한다. 

『붉은신』(오승민 지음, 만만한책방)

『붉은신』(오승민 지음, 만만한책방)은 실험실에 갇힌 동물들 이야기이고, 두발이라 불리는 인간들의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만물의 영장 인간. 누가 시작했을지 모를 이 말에 익숙해져 있는 두발이들은 오랫동안 ‘영묘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영묘한 힘을 두발이들만 잘 사는 방식으로 작동시켰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동물을 잡아가두고 유희를 즐겼으며, 자기들이 오래 살고 더 예뻐지기 위해 실험대상으로 썼다. 유전자를 조작해 보기 좋은 모습으로 변형시키고 오로지 먹이로만 쓰기 위해 좁은 철장 안에 가두기도 했다. 뿐인가, 삶터를 망가뜨려 공을 치거나 눈을 타고 내려오는 놀이를 즐기기도 했고, 여기저기를 콘크리트 빌딩으로 채우기 일쑤였다. 그래도 되었다. 영묘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니까. 

그랬던 두발이들이 이번에는 바다에 뭘 버린단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썼던 핵발전소가 망가지면서 나온 오염수다. 두발이들에게는 피해가 있다 없다 싸운다. 법적 기준치에 맞다 아니다 싸우는데 그 법적 기준치라는 것도 철저히 두발이들 기준이다.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바다라는 거대한 하얀 배에서 실험대상이 될 바다생물들에게는. 그 물을 먹고 자라고 새끼들 낳아 키워야 할 대상에게는. 두벌이들은 만물의 영장이니까. 

꼬리끝이 절망의 끄트머리인 하얀 배에서 보았던 붉은신은 지평선 너머 떠오른 태양이었다. 붉게 빛나는 동그란 붉은신. 누구랄 것 없이 모든 생명에게 동등하게 살 기회와 에너지를 주는. 생각보다 붉은신이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한 꼬리끝은 더 이상 실험가치가 없는 동물들이 버려진 폐기창고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하지만, 혼자만 가지 않는다. 삶을 포기한 채 죽을 날을 다리던 오랑우탄 손을 잡는다. 

박미숙 일산도서관 관장
박미숙 일산도서관 관장

과연, 꼬리끝과 오랑우탄은 붉은신을 만날 수 있을까? 그들이 만난 붉은신은 그들을 죽음에서 구할 수 있을까? 
두발이로 태어나 두발이로 살다 죽을 나는 오늘도 높게 떠오른 붉은신을 마주하기 부끄럽다. 그냥 이렇게 꼬리끝과 오랑우탄이 붉은신을 만나길 기원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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