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간 글을 편찬하는 것은 반드시 확실한 증거를 거치고 빈틈이 없어야 세상에 전해질 때에 사람들의 믿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여후 박태순(朴泰淳)이란 사람이 경기도 광주 부윤으로 있을 때에 허균이 편찬한 국조시산(國朝詩刪)을 출간한 일이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잘못된 것이 간혹 나온다.
즉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에서 지은 7언 율시 가운데는 기재 신광한이 지은 시를 잘못해서 복재 기준(奇遵)의 시라고 한 것이다.
이런 잘못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아마도 국조시산(國朝詩刪)의 원본에는 복재의 시가 기재의 시 바로 위에 있기 때문에 박태순이 잘못해서 기재의 이름을 그대로 써놓은 것일 것이다. 기재의 이 시는 분명히 기재의 본집(本集)에 기록되었고 또 주천현 벽(壁)에 조선 중기까지도 붙어 있었으므로 확실하다.
그리고 7언 절구 가운데 <승축에 쓴 시(題僧軸)>에 실려 있는
소운산 어구에 풀이 퍼렇게 우거졌는데,
疎雲山口草蟌蟌
밤에 향불 연기를 따라 물 서쪽 마을에 왔다.
夜逐香煙到水西
거나하게 취해 노래 부르며 밝은 달을 맞이하니,
醉後高歌答明月
강의 꽃은 떨어지고 자규만 우누나.
江花落盡子規啼
이 시는 석주 권필의 시로 되어있으나 사실 석주집(石洲集)을 모두 뒤져봐도 전연 찾을 수 없고 홍만종(洪萬宗)의 집에 전해오는 구본(舊本)에 찾아보니, 이영(李嶸)이란 사람의 시로서 석주의 시 위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역시 여후 박태순이 잘못해서 이영의 이름을 빼놓았기 때문에 통틀어 석주의 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헛되고 경솔함이 너무 심하다.
그리고 또 이른바 <율곡이 처음으로 산에 나왔다는 시(栗谷初出山詩)>는 바로 허균이 위조한 것이다.
그 스스로 붙인 주석에 이르기를
“본집(本集)에 이 시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3,4구를 숨기기 위한 것일 것이다.”
고 하였으니 그 뜻을 알기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여후가 국조시산을 정리하면서 <초출산시>는 뽑아 버리지 않고 그 주석까지 그대로 붙여 말썽을 일으켜 정부로부터 결국 판각(板刻)까지 파괴시키게 되는 일을 만들었으니 글을 편찬하는 사람으로서는 마땅히 조심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시인이 말 밖의 뜻을 붙여서 읊조리는 것은 대개 풍자하는 뜻을 포함하는 것이니 가장 묘한 법이다.
김안로(金安老)가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에 있는 동호(東湖)의 정자에 보락정(保樂亭)이란 현판을 붙이고 기재 신광한에게 시를 지어달라고 하였다.
기재는 김안로 누님의 아들이다. 칠언 율시를 지어 주는데 그 시에 풍자하는 뜻을 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안로는 그 뜻을 알지 못했다.
그만큼 시라는 것은 표면에 드러내는 것보다도 그 뒤에 숨은 뜻을 살펴야 하는데 그것은 웬만한 지식이 아니면 거의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기재는 김안로가 간신 노릇을 하는데 못마땅하기는 했으나 친분관계상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정지(貞之) 심정(沈貞)의 소요당(逍遙堂)에 쓰기를
낙엽은 가을 산골짝을 덮었고,
落葉藏秋壑
저녁 해는 반산에 비쳤네.
夕陽映半山
라고 하였으니 대개 중국 왕안석과 가사도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그런데 심정도 역시 알지 못했다. 만약에 그들이 알았다면 별로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것을 말 밖에 말이 있다는 것이다. 시가 풍자를 표현하는 것은 이런 장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가사도는 송나라 사람으로 본래 그 누이가 귀빈(貴嬪)으로 들어가게 되자 벼슬이 태사(太師)에 오르고 위곡(魏公)에 봉해져서 횡포가 극심했으며 도종(度宗) 황제 때에 갈령(葛嶺)에 집을 짓고 ‘반한당(半閒堂)’이라고 불렀다. 호산(湖山)에서 멋대로 놀며 온갖 행패를 부리다가 정호신(鄭虎臣)에게 잡혀 죽었다.
바로 이것을 비유하여 시를 지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