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 - 1521. 자는 경중 호는 복재(服齋). 본관은 행주. 조광조의 문인. 문과에 급제하고 사가 독서했고, 기묘 사화 때에 함경도 온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교살당함.
연산군 시대가 세종, 세조, 성종 시대에 대한 반동의 시대라면, 중종시대는 연산군 시대에 대한 반동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연산군 당시에는 당대 귀족층이었던 훈구파가 유생들의 성장을 막고 국가의 실권을 주름잡고 있었기에 백성들은 고통에 시달렸고, 이에 조정의 신하와 백성들이 일어나 중종 반정을 일으키게 되었다.
중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모든 정치는 이전의 성종 시대를 본받아 유교주의로 돌아가게 된다. 중종은 연산군의 나쁜 정치를 고치고 사림파를 등용한다. 중종 14년에 김식⋅안처겸⋅박훈 등 28명의 학자 등용을 비롯하여 김정⋅박상⋅김구⋅기준⋅한충 등의 조광조 일파의 신진사류가 등용되었다. 그 신진사류 중에 지도력을 가진 이가 조광조 였고 기성 귀족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그들간의 싸움은 점점 치열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광조 등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어서 현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고 너무 급진적이어서 훈구파의 귀족들을 소인으로 지목하여 격렬하게 배척하였다. 이리하여 훈구파와 신진사류사이에 알력과 반목이 날로 증대하여 갔다.
한편 기준(1492-1521)은 어느날 대궐 옥당에서 숙직을 하다가 꿈을 꾸게 되었다. 그 꿈에 그는 지방으로 나가는 관문을 통해 밖으로 가게 되었고 길을 따라 떠도는 나그네 신세가 되었다. 갖은 고생을 하며 산넘고 물건너 정처없이 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인의 기질은 어쩔 수 없었으나 보다. 꿈 속에서까지도 시를 읊었으니 말이다.
다른 지역이지만 강산은 고국과 같은데,
異域江山故國同
하늘 끝 높은 봉우리에 의지해 눈물만 흘린다.
天涯垂淚倚高峯
캄캄한 구름 꽉 끼고 관문은 닫혔는데,
頑雲漠漠關門閉
엉성한 고목나무 쓸쓸하고 성곽은 텅 비었구나.
古木蕭蕭城郭空
들판 길은 가을 풀 밖에 빤히 보이고,
野路細分秋草外
인가는 멀리 석양 가운데 드믄드믄 있구나.
人家遙在夕陽中
만리에 떠나가는 배 돌아올 기회 막연한데,
征帆萬里無回棹
망망한 바다 위에 소식 통할 길 전혀 없네.
碧海茫茫信不通
늘 지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오긴 했지만 강산은 다름없고, 하늘 끝 변방의 산 벽에 몸을 기대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는데, 고개들어 하늘을 보니 답답하고 미련하게 막힌 캄캄한 구름이 어둡고도 넓게 퍼져있는 것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시선이 머무는 곳에 관문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서 대답이 없다.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산을 내려가다 보니, 말라 비틀어진 앙상한 고목에 ‘윙윙’ 바람소리만 쓸쓸하게 들리고 모래바람만 황량하게 드날린다. 저 아래의 성곽은 그 옛날의 태평성대는 어디갔는지 공허하게 성벽 그림자만 드리우고 있을 뿐이다.
들판길은 가늘게 나뉘어서 마른 풀과 함께 적막을 돋구고 있다.
사람이 그립지만 인가는 저 멀리 해질 무렵 노을 사이로 띄엄띄엄 보이는 듯 마는 듯하다. 저 멀리 돛단배는 찌그덕 찌그덕거리며 노을진 물가에 자취를 남기며 어디론가 떠나가는데, 언제 다시 노저어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다.
바다는 넓고 넓어 아득하지만 이제는 나홀로 아무에게도 소식 전할 길 없음에 또 다시 ‘허허 - ’하는 가슴속 깊이 맺힌 탄식을 내뱉는다.
이리저리 심사를 달래보지만 어느덧 두눈가엔 어른어른 눈물이 고여 체념 섞인 한숨을 쉰다.
문득 꿈인지 생시인지 놀래서 깨어보니 그것은 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꿈속에 지은 시가 너무도 생생하여 하루 종일 잊혀지질 않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꿈에 지은 시를 이상하게 여기긴 하면서도 홍문관 벽에 써 붙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날(1519년, 중종 14년) 조광조 등은 훈구파 세력을 꺾으려고 훈구파의 위훈을 삭제 사건을 일으켜 훈구파에 도전을 하는데 이에 맞선 훈구파.
만만치 않게, 중종의 마음을 충동하여 신진 사류를 돌아내게되었다. 이를 ‘기묘사화’라 하는데, 남곤⋅홍경주⋅심정 등 훈구파의 사주가 주요 원인이지만 중종이 쉽게 마음을 돌리게 된것은 신진 사류의 급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훈구파는 경빈 박씨 등을 꼬여서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홍경주의 딸이 후궁인 것을 이용하여 궁중의 동산 나뭇잎에 꿀로 <走肖爲王>의 4자를 쓰게 한 후, 이것을 벌레가 글자만 먹어치우게 해서 글자를 나타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궁녀로 하여금 잎을 따서 왕에게 보이게 했다.
<走肖爲王>은 <조씨(趙氏)가 왕이 된다>는 뜻이므로 <走⋅肖>두 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는 것을 응용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씨 성을 가진 조광조가 지목받게 되고, 조광조 등은 당을 만들어 과격한 행동을 하고 자신들이 작고, 천한 것도 모르고 날뛰어 나라가 어지럽게 되었다고 하여 숙청당하게 된다.
조광조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배웠던 복재 기준도 이 역모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호서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가 조금뒤에 다시 함경북도 온성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온성은 함경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에 있다. 백두산을 지나서 국경 가장 위쪽 끝의 길림성과 맞닿은 곳에 있는데 동해물과 두만강물이 만나서 유포진을 이룬다.
한데 이것이 왠일인가? 북으로 북으로 일행을 데리고 귀양 떠나던 중 좌우에 펼쳐지는 광경은 바로 복재가 꿈에서 보고 시를 읊은 바로 그 풍경이 아니더냐?
머리털이 솟구치고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 아찔하여 정신을 다시 가다듬고
“잠깐 말을 좀 멈춰주시오”
하고는 시를 읊조리니 연방 두줄기 눈물이 옷깃을 적시게 되었고, 곁에서 이를 본 사람들도 함께 흐느껴 울고 말도 우는 듯 했다.
그러던 중 눈물도 잠깐, 머나먼 귀양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고 북으로가면 갈수록 옷소매사이로 바람은 애이는데, 귀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함께 황량한 들길은 발길을 재촉하려 하는 데에 있어서 더더욱 뒤를 돌아다보게 한다. 계속 일행은 움직여서 온성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가는 도중의 마음도 너무나 착잡하고 기준의 머릿속은 몇번씩이나 시를 되뇌이게 되었고 어느덧 길고 긴 여정끝에 온성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불어닥친 모진 세파는 기준을 내버려두지 않고 끝내 목졸라 죽임을 당하도록 하게 했으니, 세상일이 이미 전생에 정해졌다고는 하지만 어디 이같은 일이 또 있으랴!
훗날 도학을 부르짖는 성리학자들은 기준의 이 시를 서로 외우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주면서 시에 젖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