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신진감독
남아름ㆍ미할코비치 감독 인터뷰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홍보물. [사진제공=파주시청]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홍보물. [사진제공=파주시청]

[고양신문] 한국에선 ‘질문’이 낯설다. 빠른 산업화를 이룩한 근대 한국에선 깊은 고민이 필요한 '질문'을 비효율적이라 여겼을 법하다. 그러나 21세기 지금, ‘질문’의 필요성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모순을 돌파하기 위해선 애써 억누른 의문들을 표출하고, 고민할 여유가 간절하다.

반면, 오늘날 2030에게 좋은 고민을 위한 시간이 주어진 적은 많지 않다. 부모 세대가 어렸을 때부터 강조한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들을 찾아 헤매기에도 이들은 숨차다. 한편, 이른바 촛불혁명 이후 청년세대가 풀어나갈 고민거리, 결정거리는 각계각층에서 쉴 새 없이 새어 나오고 있다. 의문의 바다 속에서 잠깐의 사색조차 허락되지 않은 이들 청년들은 부모 세대가 남긴 유산 속에서 결정을 강요받으며 표류하는 중이다.

오는 14일 개막하는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도 이처럼 선택을 마주한 위태로운 국내외 청춘들을 그린 작품들이 있다. 586세대 부모님을 둔 20대 소녀의 고민을 담아낸 <애국소녀>와 벨라루스군에 징집돼 민주화 운동에 나선 또래들을 진압해야 하는 청년 니키타를 다룬 <마더랜드>. <애국소녀>의 남아름 감독과 <마더랜드>의 알렉산더 미할코비치 감독의 말을 빌려 선택의 수렁에 빠진 젊은이들의 심경을 풀어본다.

 

부모 세대의 유산에서, 소녀는 무엇을 얻었나
95년생 감독이자 주인공인 아름은 공무원 아버지와 페미니즘 운동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의 부모님은 민주화를 경험한 586세대로 공직에 진출한 아버지는 보수를 대표해서, 사회·제도 변혁을 외치는 어머니는 진보를 대표해 어린 아름을 자신만의 ‘애국소녀’로 키워냈다. 영화 속 어머니가 갓난아기인 아름에게 “오늘 뉴스 봤지? 대통령이 나쁜 짓해서 재판받았어”라고 말하는 장면처럼 어린 시절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그는 부모세대의 유산을 선물이라 믿어왔다.

남아름 감독은 “어릴 적 사회운동가인 어머니를 따라 집회에 참석하곤 했는데, 때때로 분노한 시위자들이 아버지가 일하는 정부 청사로 돌진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곤 했다”라며 “집회가 끝나면 청사 앞에서 퇴근하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머니와 아버지 중 누구의 곁에 서야 할지 혼란스러웠다”라며 오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소녀티를 벗고 어느새 숙녀가 된 20대, 아름은 한 가지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어른들이 이뤄낸 민주화란 무엇이었을까, 또 오늘날 우리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

영화 '애국소녀' 스틸컷. [사진제공=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영화 '애국소녀' 스틸컷. [사진제공=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마음 깊은 곳 감춰둔 아름의 의문은 세월호 참사 때 폭발한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해양수산부에서 일하며 세월호 사태를 수습하는 고위 담당자였다. 많은 국민이 아버지를 향해 손가락질하던 박근혜 정부 말기, 아름은 혼란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가 일하는 사무실에 한 장의 편지를 부친다. 남 감독은 “왜 이런 충격적인 참사가 일어났는지, 아빠가 더 열심히 할 순 없는지 답답한 마음이 담긴 질문들을 써서 해수부 사무실로 편지를 보냈다”라며 “그러나 그 편지는 행방불명되었고, 심지어는 해양수산부 직원에게 물어봐도 알 수 없었다. 당시에는 내가 보낸 호소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어느 날, 아름은 무심코 열어본 아빠의 서랍 한켠에서 그 편지를 발견한다. 이를 계기로 아버지에게 건넨 어렵사리 한마디에서 시작한 작품이 바로 <애국소녀>다. 작품은 그때 보냈던 편지 한 장과 아름의 어릴 적 모습을 담은 빛바랜 영상들을 차곡차곡 보여주며 아름이 선택의 기로에 선 순간들을 담았다. 그 기억들과 함께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나 비로소 정치적 주체를 찾아가는 과정이 이 작품이 지닌 진한 담백함이다. 양극단의 한국 정치 속에서 허우적대는 청년들에게 그는 한마디 위로를 건넨다. “지금 당장 결정 안 해도 돼요. 일단 다양한 가치들을 (존버) 존중하며 버텨보세요.”

영화 '애국소녀' 스틸컷. [사진제공=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영화 '애국소녀' 스틸컷. [사진제공=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남 감독은 이번 영화제에서 관객들에게 선물하고픈 명장면도 하나 소개했다. 바로 함께 등산하던 아름의 부모님이 두 개의 갈림길에서 잠시 멈춰서 서로를 설득하다 결국 다른 길로 올라가는 장면이다. 그는 “가고자 하는 목표지점은 같은데, 서로 다른 길을 걷고자 하는 모습이 그동안의 당신들이 살아오신 삶을 함축적 보여준다”라며 “부모가 걸어간 서로 다른 길 사이에서 ‘나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고민하는 기회를 주는 보석 같은 장면”이라고 넌지시 미소를 보였다.

 

결정을 강요받는 청년들, 누구와 함께 걸어갈까

영화 '마더랜드' 스틸컷. [사진제공=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영화 '마더랜드' 스틸컷. [사진제공=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한국으로부터 약 7000㎞ 떨어진 동유럽에서도, 결정의 순간을 맞딱뜨린 청춘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영화 <마더랜드> 속 20대 청년 ‘니키타’. 본격적인 영화 시작에 앞서 관객들은 한 가지 질문을 떠올린다. ‘동유럽 지역에서 부모 세대의 유산인 ‘소비에트 연방’을 가장 잘 간직한 나라는 어디일까?’ 혹자는 소련의 실질적 계승자인 러시아 연방, 소련 공업의 중심 우크라이나 등을 떠올릴 테지만, 영화 <마더랜드>는 '벨라루스'라고 말한다.

소련 시절 이어져 온 유서 깊은 군대 부조리부터 국가 전체에 만연한 전체주의는 벨라루스가 계승한 과거 부모세대의 유산이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KGB가 남아있는 유일한 국가가 바로 벨라루스다. 영화는 벨라루스 군대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 스베틀라나의 여정과 갓 징집된 20대 청년인 니키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어 상처의 현장을 관찰한다.

주인공 니키타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다. 여느 청년들과 같이 테크노 음악과 싸구려 파티에 심취한 그이지만, 영화 초반부 식탁에서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스탈린 시대 공업화’, ‘대조국전쟁’ 등 늘 조국의 위대함에 대해 듣는다. 국가의 규율과 방향은 중요하며, 군대에 가야 비로소 남자가 된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한국 할아버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할아버지의 영향 탓일까, 그의 ‘힙스터’ 친구들이 병역을 기피할 때 니키타는 군소리없이 군에 입대한다. 복무 후 몇 개월이 지난 뒤, 어느새 친구들보다는 동기들과 더 가까워진 니키타는 상부의 지시로 2020년 벨라루스 민주화 시위 진압에 투입돼 시위자로 참여한 또래 세대들을 마주한다. 다른 편에 서 있지만, 청년들의 눈동자 속 비치는 혼란스러움은 비슷하다. 이들은 국가, 가족, 개인을 위해 어떤 결정이든 내려야만 한다.

영화 '마더랜드' 스틸컷. [사진제공=알렉산더 미할코비치]
영화 '마더랜드' 스틸컷. [사진제공=알렉산더 미할코비치]

알렉산더 미할코비치 감독은 “니키타는 벨라루스 청년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탐색하지만, 무엇하나 결정 못한 채 군에 입대했다”라며 “이처럼 대부분의 벨라루스 젊은이는 부모 세대가 남긴 구시대적 가치와 SNS가 선물한 신세대적 가치 속에서 갈등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그러나 소련의 유산 중 하나인 교육체계는 벨라루스 젊은이들의 질문들을 틀어막았고, 이것이 오늘날 청년세대가 마주한 결정을 더 어렵게 만드는 듯하다”라고 덧붙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니키타는 영화초반부 등장한 식탁에 앉아 할아버지를 말없이 응시한다. 군대에서 어떤 결정을 강요받았고, 또 스스로를 갉아먹어 변해버렸는지 보여주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장면이다. 전역 후 무너져버린 손자 앞에서 할아버지는 소련 시절 유산이 개인을 옭아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빼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부모 세대와 젊은 세대의 상처가 만나는 이 장면이 미할코비치 감독이 가장 애정하는 부분이다. 감독은 “이 깨달음의 순간은 우리 사회 속 감춰진 희망을 보여주며, 굳어진 부모 세대조차도 성찰, 진화,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라며 “젊은 세대가 마주할 결정과 고민은 부모 세대의 것이기도 하며, 함께 걸어가길 바랄 뿐이다”라고 고민거리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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