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경제포럼 - 서은국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강연
다윈과 심리학이 밝혀낸 행복론
생존과 번식, 행복은 진화의 산물
행복은 인간 뇌에서 생성되는 자극
쾌가 묻어있는 경험의 합에 비례
[고양신문] 바야흐로 ‘행복’ 전성시대다. UN이 매년 국가별 행복지수를 발표하고, OECD는 회원국 시민들의 삶의 질을 측정할 때 ‘주관적 행복(subjective well-being)’을 지표 중 하나로 사용한다. 왜 이렇게 행복이 글로벌 이슈가 된 것일까.
그 이유는 행복이 신체적 건강, 높은 기업 생산성, 창의성, 윤리적 시민 행동, 출산율, 사회적 성공, 장수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개인과 사회에 긍정적 결과물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즉 개인과 시민이 행복해야 사회와 국가가 안정되고 경제도 성장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의미 있는 삶을 통해 어떤 큰 성취를 이룰 때 비로소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대표적 행복 심리학자이자 진화 심리학자인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행복을 삶의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틀렸고 생존과 번식의 수단이라는 다윈이 옳았다며, “행복의 핵심은 지극히 주관적인, 쾌가 묻어있는 일상 경험의 합”이라고 강조했다.
배병복 원마운트 회장, 신영이 디엔비 대표 등 지역경제인과 하성용 중부대 교수, 장철영 전 청와대 행정관 등이 참여한 가운데 15일 소노캄 고양에서 열린 고양경제포럼 11월 정례모임에서 서은국 교수가 ‘행복, 새로운 눈으로’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펼쳤다.
우리 뇌 속에 설계된 행복의 기원
서은국 교수는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종신 교수직을 거쳐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 수업을 들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과학’이라는 그의 수업에는 수강 대기자가 수백 명이 넘는다.
그는 지금까지 막연하게만 다뤄졌던 ‘행복’을 과학적인 시각으로 탐구하고, 그 본질을 추적하는 행복 연구의 권위자로, 『행복의 기원』, 『Culture & subjective well-being』(MIT Press) 등 책과 100여 편의 행복 관련 논문을 펴내며 ‘세계 100인의 행복 학자’로 선정됐고, 학문적 연구와 더불어 삼성, 현대, LG 등 기업강연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이날 강연에서 서은국 교수는 행복이 삶의 최종 가치이자 목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행복론’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지만 비과학적이라고 지적하며, 모든 생명체가 생존과 재생산을 위해 최적화돼 있다는 다윈의 진화론과 현대 심리학에 근거한 ‘과학적 행복론’에 대해 다양한 연구와 분석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을 이어갔다.
강연 시작에 앞서 그는 “행복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기보다는 인간의 뇌에서 생성되는 자극”이라며 “행복은 고시합격, 값비싼 아파트 소유, 승진 등을 통해 수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하나의 소리에 불과하고, 이 소리를 만드는 악기가 뇌이기에 무작정 ‘행복’이라는 소리를 쫓기보다는 언제 나의 뇌가 ‘행복’이라는 소리를 내는지, 즉 우리의 뇌가 언제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지 아는 것이 행복의 본질을 깨닫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말했다.
행복 전구는 ‘쾌’한 경험에서 켜져
인간과 침팬지가 진화의 여정에서 갈라진 것은 대략 600만 년 전이라고 한다. 호모사피엔스가 문명인의 모습으로 산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잠깐이다. 만일 시간을 1년으로 압축한다면 인간이 문명 생활을 한 시간은 365일 중 고작 2시간 정도다. 즉 우리는 1년 365일 중 12월 31일 밤 10시 정도까지는 야생에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사냥, 그리고 짝짓기에만 전념하며 살아온 동물이었을 뿐이다. 뇌는 그러한 살벌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은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일종의 ‘생존지침서’다. 생존과 재생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소프트웨어가 바로 인간의 뇌지만, 원래 행복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서 교수의 설명이다.
사실 인간은 단지 지능이 높을 뿐 당나귀나 타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100% 동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윈의 진화론과 최근 심리학의 다양한 연구들이 명쾌하게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 인간이라는 동물은 ‘행복’을 느끼게 됐고, 또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살아가는 것일까?
서은국 교수는 수준 높은 인간의 뇌가 ‘마음’이라는 기발한 연장을 사용해 긍정적인 생각이나 태도, 믿음 등을 갖는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오히려 행복은 이성적 사고가 아닌 ‘쾌, 불쾌’와 같은 정서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인간이 행복을 이성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오류라는 지적이다.
유전적 요인이 행복의 개인차 결정
서 교수는 “행복의 본질은 이성이 아닌 ‘좋다’라는 정서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이 ‘좋다’라는 느낌을 주고, 돈이 부족한 사람에게 돈은 ‘좋다’라는 감정을 유발하며, 직장인에게는 승진이 ‘좋다’라는 성취감을 준다. 행복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그러한 ‘좋다’라는 경험의 합이라고 할 수 있다”며 “그런데 한국사회는 '자신이 스스로 행복해지는 법'이 아닌, '남들에게 행복하게 비치는 법'을 중요시 여겨왔다. 사회적 잣대에 의해 결정되는 행복은 대개 나의 근본적 행복과 다른 경우가 많으므로 자신만의 가치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덧붙였다.
행복의 지속성 또한 개인마다 다르다. 우리가 행복한 감정을 처음 느낀 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감정에 적응해 무뎌지게 되는데, 그 적응 속도는 개인별로 다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행복감을 잘 느낄까?
그가 꼽는 행복의 개인차를 결정짓는 것은 ‘유전, 더 구체적으로는 외향성’이다. 서 교수는 “키와 같은 신체적인 요인과 마찬가지로 정서적인 요인 역시 유전의 영향을 크게 받고, 외향적인 사람이 내향적인 사람보다 대체로 행복감이 높은 이유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은 사회적 경험을 더 많이 하고 또 즐기기 때문”이라며 “행복에 관한 수백 편의 논문은 사회적 경험이 행복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에 행복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행복 하고픈 이유는 생존하기 위해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을 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생존에 도움이 되는 상황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음식을 먹는 행위는 영양분을 보충함으로써 생존율을 높여줘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쾌감’을 느낀다. 반면 썩은 나무, 더러운 물 등을 보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행복의 반대인 ‘불쾌감’을 느낀다. 인류가 진화하면서 생존에 유리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는 개체만이 결국 살아남았다는 것이 서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우리는 언제나 행복을 목적으로 살아왔음에도 행복이 왜 좋은지에 대한 질문에는 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화론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행복해지고자 하는 이유는 생존하기 위해서라는 명쾌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라며 “그런 맥락에서 인류가 고된 몸을 추스르며 사냥에 나서고 농사를 짓고 채집을 했던 이유는 바로 음식을 먹었을 때 느끼는 ‘쾌감’이라는 행복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얻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높은 사회적 신뢰와 양질의 경험 중요
지구에서 먹이사슬의 중간지점에 있었던 호모사피엔스가 어떻게 해서 최정점으로 이동할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타인’과의 협력을 통해 생존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자원을 획득하고 재생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혼자서는 매머드를 상대하기 어렵지만, 10명이 서로 힘을 모아 함께 사냥에 나서면 매머드를 잡아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유레카(Eureka)! 인간이 사회적 협력을 통해 마침내 지구를 정복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타인을 도구로 사용해 협력한다면 인간이 슈퍼맨이 될 수 있지만, 사회적 고립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왕따’와 같이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은 암도 더 잘 걸리고, 우울증에 더 심하게 빠지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될 확률이 더 커지게 된다.
서은국 교수는 “행복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경험’의 합이다. 따라서 행복한 개인·조직·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개인주의', '높은 사회적 신뢰', '양질의 사회적 경험'이 필수 요소”라며 “인간의 생존에 필수품인 ‘행복’이라는 전구를 자주 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좋은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소소하지만 즐거운 시간과 경험을 늘려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관점에서 홀로인 인간이 타인을 찾고 또 협력하며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특성을 보이는 이유는 행복이라는 ‘도구’를 활용하기 위해 우리의 DNA에 깊게 각인해 놓은 기본전략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