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증충공사서 임금체불
부실 하청업체 경고한 현장
"예방조치 없던 원청 책임"
발주처·원청은 "소관아냐"
[고양신문] “임금체불은 살인이다. 사람 살리는 병원에서 살인이 웬말이냐”
덕양구 행신동 한 병원 증축공사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임금체불 해결을 요구하며 공사장 앞에서 매주 집회를 열고 있다. 이들 노동자는 작년 9월부터 공사에 참여해 5개월 넘게 일했으나 올해 1월부터 임금이 밀리다가 3월 이후로는 아예 받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무급으로 일한 올 3~5월 동안의 임금 총액은 인력사무소 추산 3093만원이다. 이들이 받아야할 밀린 노임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부도조짐 보였는데… 하청에 노임을
통상적으로 건설공사는 발주처가 시공사인 원청에 작업을 의뢰하면, 원청이 공사의 각 전문분야를 담당하는 ‘하청업체’에 도급을 주고, 하청업체는 인력사무소에 도급을 줘 일할 건설노동자를 공급받는 식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인력사무소인 조아인력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해야 할 중간 하청업체가 올해 5월 부도처리가 됐고, 현재 대표는 원청으로부터 받은 노임을 챙겨 잠적한 상태다.
이에 조아인력 직원과 일용직 노동자들은 못 받은 노임에 대해 원청과 발주처인 병원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원청은 이미 노임을 하청업체에 전달했으니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다. 해당 사건에 대한 기자의 질의에 원청 현장사무소 차장은 “사건 관련해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라며 “여기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라고 답변했다.
조아인력은 그간 병원 증축공사 현장의 하청업체에 작업자를 투입하고, 이들에 대한 임금을 다음달 말일 결제받는 방식으로 진행해왔다. 그러나 올해 초부터 중간 하청업체의 노임지급이 조금씩 늦어지기 시작했다. 조아인력 이승도 과장은 “1~3월 노임이 조금씩 늦게 지급되자 이상함을 느껴 인력사무소 차원에서 해당 하청업체를 조사했다. 그 결과 자금운용상태가 불량했음이 드러났고 6월 22일 폐업처리됐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올해 1월부터 3월까지 조아인력 측이 원청에 지속해서 경고했으나 원청은 아무런 예방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노임 지급이 멈춘 3월 이후 조아인력은 하청업체에 문제가 있으니 직접 노임을 받겠다며 하청 대표의 ‘직불동의서’를 받아 밀린 금액 지급을 원청에 요청했다. 그러나 원청은 조아인력이 직접적인 계약관계를 맺지 않아 노임 지급이 불가하다는 답변만 내놓았다.
타협안으로 조아인력은 '하청업체가 심상치 않으니 노임사고 방지를 위해 일단 하청업체 쪽에 지급하기로 한 금액만 당분간 보류해달라’라고 요청했으나 원청은 조아인력에 통보없이 하청업체에 5월 말 모든 노임을 지급해버렸다. 그리고 한 달 후 해당 하청업체는 부도신청을 냈다.
이승도 과장은 “갑작스럽게 부도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 인력사무소 쪽에서 경고해왔음에도 이를 무시한 것이기에 그에 대한 책임을 원청에서 일정 부분 질 필요가 있다”라며 “우리 노동자들과 인력사무소의 생계가 걸린 문제를 남일인양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도 하청업체에 노임을 지급해버린 것은 ‘귀찮음’ ‘무책임’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라고 토로했다.
원청의 주장처럼 근로자에 대한 임금지급 책임은 계약을 직접체결한 사업주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은 제44조의2 특례규정을 통해 건설업의 경우 근로계약 당사자가 아닌 직상수급인, 즉 원청에게 임금을 청구할 수 있다는 ‘임금지급 연대책임’을 보장하고 있다. 따라서 원청의 주장처럼 조아인력과 원청이 직접계약을 맺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이 없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적다.
체불임금 받겠다는데 접근금지명령?
발주처인 병원의 대응도 눈길을 끈다. 조아인력 관계자들과 공사에 참여한 일용직 노동자들은 병원 정문 앞에서 원청의 체납노임 지급을 요구하며 집회시위를 벌이고 있다. 해당 집회는 모두 사전에 고양경찰서로부터 허가를 받은 건이며, 한 달 단위로 집회계획을 신고해 경찰서에 사전 연락만 한다면 언제든지 집회가 가능하다.
지난 10월 병원은 이들에 대해 접근금지 및 업무방해금지가처분을 신청했다. 체납노임을 요구하는 이들 집회가 병원을 방문하는 고객들에게 불쾌감을 줄 뿐 아니라, 현수막에 적힌 문구가 병원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재판부는 “현수막 문구는 다소 이 사건 병원에서 채무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아니한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으나 채무자들은 이 사건 병원 증축 공사를 하고 임금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전혀 터무니없는 사실을 기재했다고 보긴 어렵다”라며 병원 측 신청을 기각했다.
이와 관련해 병원 행정본부장은 “병원을 상대로 집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원청을 상대로 진행해야 타당함에도 환자분들께 피해를 끼치면서까지 잘못된 책임 주체를 겨냥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조아인력 측은 병원이 아니라 증축공사현장에서 집회를 벌이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시위현장과 병원 정문이 인접해있다는 점과 시위 메시지가 병원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까운 시일 내에 손해배상청구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이승도 과장은 “건설현장에서 임금체불 등 문제가 발생하면 발주처가 해결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원청·하청업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협상 테이블이라도 마련해주는 것이 통상적이나 병원 측은 남일인양 대응한다”라며 “지역사회 의료의 한 축을 담당하는 병원을 짓는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갖고 증축공사에 임해왔으나 막상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마저 박탈하려는 병원의 모습에서 안타까움과 씁쓸함을 느끼는 중”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