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산에 산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애 셋 모두 이곳에서 중 · 고등학교를 다녔으니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빛나던 시절의 소중한 기억이 있으리라.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살고 있는 일산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마도 ‘과거’와 ‘자연’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즉 일산은 나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흘러가 버린 지난날의 아스라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문득문득  돌아가고 싶은 고향과 흙에 대한 향수에 젖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는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월요일 아침마다 노랫소리가 들려와 11층 거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면 월요 조회가 열리고 있었다. 울긋불긋 온갖 색깔의 옷을 차려입은 어린이들로 가득 찬 운동장은 마치 꽃밭처럼 눈부셨다.

가을 운동회라도 열리는 날이면 병아리같이 짹짹거리는 소리, 와와 고함 지르는 소리, 응원하는 소리들이 멀리서인 듯 들려왔고, 운동장 가에 쳐진 하얀 천막들과 운동장 위를 뒤덮은 만국기와 하얀 운동복을 입고서 뛰고 달리고 춤추는 어린이들이 만들어내는 축제에 나도 덩달아 신이 나곤 했다.

그런가 하면 졸업식 때 애국가 · 교가와 함께 으레 들려오는 졸업가는 그 옛날 아쉬움에 한없이 슬프게도 했다.

나는 서울 출퇴근 때 일부러 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서 오간다. 모래가 섞인 흙을 밟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그날 그 순수하고 근심 없던 때 마음껏 뛰놀던 어린 시절로 잠시나마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 늦게 한잔하고 돌아오면서 이 운동장을 지날 때는 초등학교 때 불렀던 ‘봄노러, ‘여수’ 같은 노래들을 부르기도 하는데 나무에서 잠자던 새들이 놀라 깨거나 학교 건물 바로 뒤 아파트 고층에 사는 주민이 창문을 열고 내려다볼 때는 조금 미안했다.

나는 또 일산에서 친구 소유의 빈 땅 중 30여평을 공짜로 빌려 손수 밭을 일궜다. 크고 작은 돌들을 골라내고 흙을 잘게 부숴 반듯하게 만든 몇 개의 이랑은 지나가는 사람마다 “마치 두부 모 같다”고 감탄할 정도였다.

철저한 무공해 농법으로 화학비료나 농약은 일절 쓰지 않았다. 퇴비를 하고, 벌레는 그냥 놔두거나 심하면 집게로 잡아냈다. 잡초가 아예 태어나지 못하도록 흙을 검은 비닐로 덮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자라난 잡초는 손으로 뽑아주었다.

그리하여 5년 동안 땀 흘려 정성스레 재배한 채소와 과일은 봄부터 가을까지 상추 · 쑥갓 · 아욱 · 근대 · 부추 · 시금치 · 고추 · 오이 · 옥수수 · 토마토 · 감자 · 고구마 · 무 · 배추 등이었는데, 더러 이웃에 나눠주기도 했다. 우리 아이들은 이런 채소들을 먹고 자라서인지 김치도 잘 먹고 몸도 튼튼하다.

그러나 하천가에 자리한 나의 이 작은 밭은 1년 전 하천가를 시멘트 벽돌로 쌓는 당국의 이른바 ‘하천 정비’로 인해 사라지고 말았으니 못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갈 때 창밖으로 푸르른 논과 밭들이 펼쳐지면 나는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서울의 베드 타운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산에는 아직 자연이 남아 있고 그 자연이 일산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기차가 서울역에 가까워지면 나는 더욱 기분이 좋아진다. 건널목에 이르러 많은 자동차들이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그 오만한 ‘빠름’을 잠시 접고 다소곳이 기다려 주기 때문이다.

30년 전 일산 백마역에서 내려 근처 막걸리집에 들러 술을 마시고 난 뒤 기차로 돌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김동호/방송위원회 심의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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