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할미꽃이 피었습니다

동강할미꽃(강원도 정선,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촬영)
동강할미꽃(강원도 정선,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촬영)

[고양신문] 동강할미꽃이 피기 시작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사무처장이 보내온 사진에 예쁜 꽃포기가 하늘을 향해 수줍은 듯 미소짓는 모습이 담겼다. 3월 중순 넘어가면서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다면서 예년보다 한 주일쯤 이르다고 한다. 지구온난화, 기후변화가 동강할미꽃에도 영향을 준 건 아닐지 김 처장은 걱정한다. 동강할미꽃은 전설에 나오듯 양지바른 무덤가에서 할머니 허리처럼 줄기가 굽어 머리를 숙인 채 피는 여느 할미꽃과는 사뭇 다르다. 회갈색 석회암 절벽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핀다. 토양의 산성도에 따라 붉은 자줏빛, 분홍, 청보라, 흰색 섞인 보라색을 띤다. 한강의 상류인 강원도 정선, 영월의 동강이 흐르는 절벽 지대가 주된 서식지임이 학명(Pulsatilla tongkangensis Y.N. Lee et T.C. Lee)에 명시될 정도로 우리나라 고유종이다. 다른 봄꽃이 만개하기 전에 일찍 피는 동강할미꽃을 보러 탐방객이 모여든다. 덕분에 정선 산골이 자연관광, 생태여행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동강할미꽃(강원도 정선,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촬영)
동강할미꽃(강원도 정선,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촬영)

소중한 우리의 동강할미꽃이 영영 사라질 뻔한 적도 있었다. 34년 전, 1990년 9월에 한강 유역에서 400~500㎜의 큰비가 쏟아졌다. 사망 126명에 이재민이 18만 명에 이르렀다. 수도권 한강 하류에서도 수위가 올라 고양시 지도읍의 강둑이 터지는 바람에 능곡과 일산 일대가 물에 잠기기도 했다. 정부가 대책이라면서 내놓은 게 강원도 영월읍 거운리의 동강을 가로지르는 댐이었다. 당시 대통령 노태우의 지시였다. 홍수도 막고 가뭄에 대비해 물도 확보한다는 거였다.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와 수자원공사가 총대를 메고 앞장섰다. 김영삼 정부 4년째이던 1996년 2월에 건교부가 댐 사업 기본계획을 발표하자 찬반 논쟁과 갈등은 더욱 치열해졌다. 동강의 자연 풍광과 생태계를 파괴할 뿐 아니라 지하 동굴이 많은 석회암 지대에 댐이 들어서면 암반이 무너져 대형 사고가 날 수 있다면서 환경 진영은 반대했다. 건교부와 수공은 석회암 지대에 건설한 댐은 외국에도 많고 2011년까지 11억2000만 톤의 물이 필요하다고 반박하며 댐 건설을 고집했다.

평창 칠족령 전망대에서 본 정선 동강 전경(한국내셔널트러스트, 박도훈 드론 촬영)
평창 칠족령 전망대에서 본 정선 동강 전경(한국내셔널트러스트, 박도훈 드론 촬영)

10년 가까이 이어진 논란과 갈등에 마침표를 찍은 이는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2000년 6월 5일 세계 환경의 날, 김 대통령은 '새천년 국가환경비전'을 발표하면서 동강댐 백지화를 선언했다. '환경의 이름으로 국책 개발사업을 물린 첫 대통령'이라고 언론인 김택근은 의미를 부여했다(『김대중 평전 새.벽.』 김택근 저, 사계절, 355쪽).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적인 갈등 사안을 명확하게 판별할 줄 알았던 정치 지도자였다. 역대 정부마다 늘 개발 세력 뒷전의 찬밥 신세인 환경부지만 김대중 정부에서는 장관과 공무원들이 소신을 지킬 수 있었다. 당시 환경부는 환경영향평가 권한과 산하 기관들의 조사 연구 역량을 공정하고 충실하게 발휘해 댐 건설의 문제점을 짚어냈다. 환경부 장관과 건교부 장관이 논전을 벌일 정도로 당시 국무회의는 활발했다. 민간 학회 전문가들의 양심적인 조사 연구, 환경 보호 활동가들의 열정, 신경림을 비롯해 시인, 소설가 228명의 예지가 담긴 문집  '동강의 노루궁뎅이'가 동강의 자연과 환경 보전 쪽으로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강원도 정선 동강전망대에서 본 동강 전경(한국내셔널트러스트, 남준기 드론 촬영)
강원도 정선 동강전망대에서 본 동강 전경(한국내셔널트러스트, 남준기 드론 촬영)

'지구는 후손들에게 빌려서 잠시 머무는 곳'이라는 게 김대중의 지론이었다. 퇴임 후에 쓴 일기에 우리를 깨우는 귀절이 있다고 언론인 김택근은 소개한다 -- “인간의 환경 파괴로 기후 온난화가 본격화하여 한국에도 아열대 식물과 어족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환경 파괴로 인류는 큰 재난을 앞두고 있다(『김대중 평전 새벽』 355쪽)”. 김대중의 환경 국가관은 2001년 1월 16일 환경인 신년모임 연설에도 나타난다. “우리가 가꾸어야 할 나라의 모습은 경제가 튼튼하고, 환경이 쾌적하며, 문화가 살아있는 선진 국가입니다. 지구를 어머니로 생각하고, 이 지구상의 만물을 형제로 생각해서 같이 살고 같이 번창하고 같이 가꿔나가야 하겠습니다(『김대중 자서전2』, 삼인, 387쪽)”. 4대강 물관리 종합대책을 비롯해 김대중 정부의 환경 정책은 역대 정부에 비해 세심하고 과단성을 지녔다. 다만 1997년 대선 후보 시절에 내놓은 그린벨트 해제 공약이나 노태우정부 때 시작한 논란 높은 새만금 방조제 사업을 끝장내지 못한 건 오점 또는 한계로 짚어 마땅하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 상말과 삿대질이 난무한다. '반국가 세력, 종북 세력' 발언이 21세기 유권자들에게 얼마나 먹힐까, 두고 볼 일이다. 하늘에서 별이라도 따다 안겨주겠다는 식의 온갖 선심 공약을 쏟아내는 건 여당 야당이 따로 없다. 기후위기에 대처한다면서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부어야 할 가덕도 신공항, 생태 환경 죽이는 제주2공항과 새만금공항, 고작 30년 된 아파트의 재건축 재개발, 철도 지하로 옮기기, 이런저런 고속도로, 여기저기 케이블카... 온 나라에 계속 삽질을 가해 상처를 더 깊이 후벼파겠다고 벼르기 경쟁이다. 대통령부터 나서서 그린벨트 풀어주겠다고 하는 판이다. 언론인 김택근의 표현을 빌면 상대방에게 붉은 물을 끼얹는 행태, 문명사회를 팽개치고 부족사회로 돌아가는 행태가 여전하다. 정치인들은 지키지도 못할 삽질 헛공약을 내려놓으라. 대신에 약자를 일으키고, 화합, 고른 기회, 평화, 미래 세대를 배려하는 선한 정치를 펴라. 동강할미꽃을 지키고 역사에 묻힌 선배 정치인, 현명한 시민들에게 배우기 바란다.

박수택 생태환경 평론가
박수택 생태환경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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