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꽃나무에 둘러싸인 농장풍경
꽃나무에 둘러싸인 농장풍경

[고양신문] 요즘 농장에 가면 빗자루한테 일을 시켜도 부족할 만큼 할 일이 치쌓여있다. 그런데도 나는 세상 한가한 사람처럼 느긋하게 평상에 앉아서 아, 참 좋다 감탄을 해가며 꽃들에게 마음을 뺏길 때가 많다. 

농장을 품은 앞산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졌고, 농장 주변에 일렬로 늘어선 목련엔 폭죽이 터지듯 순백색의 꽃이 만개했다. 목련 아래쪽엔 울타리 역할을 하는 개나리가 주변을 온통 샛노랗게 물들였고, 농막 옆으로는 이팝나무의 꽃이 물살에 부서지는 햇살처럼 반짝인다. 농장 주차장에서 느티나무 쪽으로 걸어오는 길가에는 냉이꽃과 제비꽃과 민들레가 뒤섞여 지천으로 깔렸고, 농장 회원 몇몇이 텃밭에 일군 꽃밭에도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일제히 피어났다. 

농장회원이 가꾼 꽃밭
농장회원이 가꾼 꽃밭

누군가는 그 꽃들을 보고 일 년 중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고 표현했지만 내 눈에는 그냥 시간이 정지해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꽃에서 눈길을 떼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젊은 시절의 나는 많은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꽃이 예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꽃다발을 선물로 받고 싶어 하는 여자들의 심리가 양자역학만큼 난해하게 여겨졌다. 오죽하면 연애하던 시절, 노점에서 파는 장미꽃을 본 아내가 장미꽃 한 송이만 사달라고 졸랐을 때 아이, 뜨셔라 냅다 줄행랑을 놨을까.

물론 그로부터 몇 달 뒤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은 아내에게 스물아홉 송이의 장미꽃을 선물하기는 했지만 꽃다발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하게 여겨지던지 도저히 지하철을 탈 용기가 나지 않아서 택시를 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흔 살 무렵엔 선배 시인에게서 넌 소설 쓰는 작자가 꽃 이름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느냐고 가엾어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꽃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건 농사짓던 첫해에 쑥갓꽃과 마주했을 때였다. 그건 한송이의 꽃이 아니라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해에 나는 텃밭에서 만난 모든 꽃들의 사진을 찍어서 마음의 앨범에 저장해두었고, 종종 호수공원에 꽃을 보러 가기도 했다. 

진달래를 감상하는 시간
진달래를 감상하는 시간

그로부터 훌쩍 십오 년이 흐른 작년에 나는 손수 다양한 종류의 꽃을 사다가 평상 뒤쪽에 나만의 꽃밭을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올해에는 꽃들이 유달리 더 예쁘게 보인다. 밭에서 일할 때에도 부러 일손을 멈춘 채 꽃들을 한참 쳐다보기도 하고 아직 피지 않은 꽃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농사를 짓는다는 건 꽃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추는 말할 것도 없고 밭에서 키우는 작물들은 때가 되면 일제히 꽃을 피워올린다. 꽃이 핀 그 자리에 고추와 가지와 토마토와 오이와 참외와 호박 등속이 달리는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하나의 우주가 열리는 것 같다. 그렇게 탄생한 열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씨앗이 된다. 농사가 바쁘다 보면 더러 수확 시기를 놓쳐 버려지는 작물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듬해 봄에 보면 심지도 않은 모종들이 여기저기서 까꿍 하고 올라오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노년을 향해 갈수록 꽃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꽃 안에 우리의 근원이 들어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꽃으로 피어나서 지고 있는 것인지 자꾸만 되돌아보게 되고 그래서 더러 환한 햇살 속에 화사하게 피어난 꽃이 먹먹하게 슬퍼 보이기도 하면서….
 

김한수 소설가
김한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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