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비슷한 거 하는 M세대의 글쓰기>
[고양신문] 도시인에게는 고향이 없다고들 합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곳, 훗날 늙고 작아진 몸으로 돌아가 안기고픈 곳이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척 쓸쓸하게 느껴진 저는 고향을 하나 만들기로 했습니다. 마흔을 앞두고 보니, ‘아는 시골’ 하나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춘천에 있는 한 선원에 다녀왔습니다. 노년에 혈혈단신으로 시골에 기거하기에는 불안한 감이 있어 선량한 사람들이 모인 곳 근처에 터를 잡을 요량입니다.
오가는 데만 9시간이 넘게 걸리는 여정이다 보니, 길동무로 책은 필수입니다. ‘고향을 쫓는 모험’이라는 콘셉트에 맞춰 하루키의 『양을 쫒는 모험』을 들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양을 쫓다 글을 쓰다 넋을 놓다 다시 양을 쫓다 보니 어느새 선원입니다.
첫 방문 때는 사람이 거의 없어 선원에 밴 압도적인 침묵에 매료됐는데, 이번엔 곳곳에서 말소리가 들려와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고향’으로 삼기 위해서는 대면해야 할 불편함입니다. 집주인과 안면을 트고 얼굴을 자주 비춰 서로 조금씩 낯을 익혀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휴게실 문을 열었을 때 그분들, 그러니까 절에 가면 제일 먼저 호구조사를 한다고 알려진 개량 한복의 그분들이 계셨을 때도 돌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곳은 묵언이 규칙인 곳이라 제게 무어라 질문을 던질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저 혼자 안절부절못하여 들락날락하다가 결국 다시 법당으로 갔을 뿐입니다.
그렇게 홀로 법당에 앉아 명상을 하는데, 이번엔 이곳에도 누군가 들어왔습니다. 그 누군가는 조용히 제 뒤쪽으로 가서 방석을 깔고 앉았는데, 저는 이 누군가가 궁금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여 살짝 눈을 떠서 볼까 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더욱 불편해질 것 같아 꾹 참았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기침이 나고 콧물이 흐르고 온갖 예민한 증상이 올라와 결국 쥐처럼 법당을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달리 갈 데가 없어 다시 휴게실로 발길을 옮겼더니 마침 실내가 비어 있었습니다. 그제야 안도감을 느낀 저는 천천히 차 한 잔을 우려 마셨습니다. 아.. 행복이 이곳에 있었습니다. 남의 집에 와서 이토록 아무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니, 저는 정말 이상한 사람입니다.
차를 얻어 마신 값으로 가져온 키세스 초콜릿을 한 줌 바구니에 넣어두고는 나가서 얌전히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까 본 개량 한복 선생님이 따라 나오기에 저는 가볍게 묵례를 하면서도 이것저것 캐물을까 싶어 잔뜩 긴장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버스 타고 오셨나 봐요?” 한마디 던지고는 길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더니 이내 올라와서는 “버스 곧 오겠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하곤 다시 선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선생님은 버스가 잘 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 내려가 봤던 겁니다. 무심을 가장한 다정함, 제가 가장 좋아하는 형태의 애정입니다.
마음 구석진 곳까지 온기가 퍼지는 것을 느끼며 저는 뒤뚱이며 올라온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기사님도 저만큼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빈 차로 갈 줄 알았는데 타셨네! 꽉 잡으세요!” 그리고 그는 50분간 죽음의 곡예 운전을 선보였습니다. 굽이진 내리막길을 신명 나게 밟아대며 “이런 데 버스가 다니는 게 신기하지 않아요?” 하며 껄껄 웃었습니다.
저는 이미 옆에 와 있는 것 같은 저승사자에게, 아니라고, 오늘은 아니라고 애걸하는데, 같이 탄 어르신들은 모내기는 다 했냐, 딸내미 포장마차는 잘 되냐, 하며 정답게 담소를 나눴습니다. 오직 저만이 두 손으로 손잡이를 붙든 채 숨죽여 울었습니다.
내 고향 남쪽은 다정과 스릴이 넘치는 곳인 듯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