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육각정. 사진제공 = 고양시.
고양 육각정. 사진제공 = 고양시.

[고양신문] 일본 야마구치현 이와쿠니시 모미지다니공원에 가면 눈에 익은 육각 지붕의 정자 하나가 연못가에 외롭게 서 있다. 안내판에는 “이곳에 있는 육각정은 한국경기도벽제관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1918년 옮겨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라고 친절하게 일본어와 한국어로 설명되어있다. 이처럼 일본인들조차 인정하고 있는 우리의 정자가 어떠한 사연으로 낯선 일본 땅으로 건너가게 된 것일까 자못 궁금하다.

행주대첩비. 사진제공 = 고양시 관광과.
행주대첩비. 사진제공 = 고양시 관광과.

매년 3월 14일이면 고양시 행주산성 충장사에서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의 승전을 기념하는 <행주대첩제>가 열린다. 당시 전투가 있었던 날은 1593년 음력 2월 12일이었으나 지난 1983년 행사를 시작하면서 양력으로 환산하여 3월 14일로 고정하였다. 행주대첩은 임진왜란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아주 큰 승리였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한성(漢城)에 모인 왜군의 총사령부가 수도권의 조․명 연합군을 섬멸하기 위해 시범적으로 3만의 대군을 파견한 전투였다. 당시 행주산성에는 3천 여명의 조선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10대 1의 절대적인 열세였으나 권율 장군과 부장들의 뛰어난 리더십, 민․관․군의 단결된 힘, 우수한 신식무기의 활용 등 뛰어난 전술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왜군은 싸울 의지를 상실하고 명과의 협상에 집중하면서 주력부대를 남부지방으로 이동시켰다가 본국으로 철수한다. 이것이 1차 임진왜란의 종전이다. 물론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이순신의 활약, 각지의 의병활동, 조․명 연합군의 반격 등 종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행주대첩은 전쟁의 전체적인 흐름을 바꾼 위대한 승리였다. 

  그런데 고양시는 이처럼 구국의 위대한 정신을 지니고 있는 행주대첩을 어떻게 기리고 있는가? 그나마 코로나 이전에는 취타대 행진, 승전굿, 전투장면 시연 등 볼거리가 많았는데 지금은 고양시와 고양문화원의 직원, 제전위원회 등 관계자 몇 명만 모여 간단한 제례행사만 치른다. 이와 비교하여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서 지역의 대표축제로 자리 잡은 통영의 한산대첩제나 진주의 남강 유등축제(진주대첩제)에 비해 너무 초라하고 소홀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해 본다. 

  임진왜란 기간 중 고양시에서는 또 하나의 큰 전투가 있었다. 왜군이 이여송이 지휘하는 조․명 연합군을 물리친 벽제관 전투이다. 실제 전투는 벽제관에서 남쪽으로 3㎞ 쯤 떨어진 곳에서 있었는데 이곳의 지명을 따서 ‘여석령(礪石嶺, 숫돌고개) 싸움’이라고도 불린다. 이 싸움에서 이여송은 평양성 탈환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조급한 한성탈환 작전을 구사하다가 왜군의 기습을 받아 패전한다. 벽제관은 지금의 고양시 고양동에 소재했던 조선시대의 역관(驛館)이다. 주로 명나라와의 교류와 관련하였던 곳이라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자랑삼아 ‘벽제관 전투’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여과 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명칭에 대한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이 전투에서 깃카와 히로이에라는 이와쿠니번 출신의 왜군 장수가 큰 공을 세우는데 일제강점기 2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도 같은 이와쿠니번 출신이다. 하세가와는 고향 출신의 존경하는 장수를 기리기 위해 벽제관에 방문했다가 근처에 있던 육각정을 보고 이를 전승기념물로 이와쿠니시 모미지다니 공원에 옮길 것을 지시한다. 

  이러한 사연으로 고양 육각정은 강제로 반출되어 왜군 장수의 승전을 기리며 100년이 넘는 시간을 쓸쓸하게 보내고 있다. 2013년 <고양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잠시 펼쳤던 반환 운동은 이제 기억에서 조차 사라져 버렸다. 고양 육각정을 되찾아 오는 일은 단순히 문화재 하나를 환수하는 차원을 넘어 고양의 자존심을 되찾는 상징적인 의미가 될 것이다. 

고양육각정 안내판 문구. 사진제공=고양시
고양육각정 안내판 문구. 사진제공=고양시
윤병열 고양문화원 고양학연구소 전문위원
윤병열 고양문화원 고양학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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